외국에 산 적이 있다. 나도 작가처럼.

처음은 태국이었고, 그 다음은 영국이었다. 태국에서는 1년, 20대 끝자락이었고, 30대가 넘어가면서 영국에서 3년 정도 살았다. 태국에서는 삶을 꽉꽉 채워 살았다. 이제는 그다지 짧지 않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바로 태국에서의 1년일 것이다. 외국인을 좋아하는 태국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도 많이 받았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서 정말 신나게 지냈다. 그 때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도 별로 없었고, 또 젊었다.

생전 처음으로 외국에서 살아봤지만 생각보다 잘 살아내는 내 모습에 자신감을 얻어 영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상황은 아주 많이 달랐다. 내가 태국어를 했던 것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할텐데도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조금만 못 알아들으면 그 다음부터는 당황이 되어서 아예 들리지 않았다. 처음 2년 동안은 공부를 했었는데, 잘 하라고 압박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괜한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이후 진로에 대해서 고민이 제법 컸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값진 시기였는데, 그렇게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내 자신을 어떤 틀 안에 가두고, 그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년째였다. 일 때문에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갔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회색 도시에서 어느덧 내 마음도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잠을 잘 못 자는 날들도 있었고, 짐을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무사히 고비를 넘기고 기간을 채울 수 있었지만, 그 때의 경험으로 낯선 도시에 혼자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계속해서 마음 속으로 작가에게 응원을 보냈다. '뉴욕에 있는 1년 동안은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경험해보겠다'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더라도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결심을 지켜 나가길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다행히 그녀는 내면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익숙한 미술 뿐만 아니라, 음악, 공연, 춤, 사람, 여행...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자신이 스스로 만들었던 경계를 뚫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감탄스러웠던 부분은 작가가 혼행으로 선택한 여행지가 무려 카리브해였다는 것. 칸쿤 리조트에서 혼자 여행을 즐기다니, 정말 존경스러웠다. 나도 가끔 혼자 여행을 꿈꾸지만 휴양지에 혼자 가는 것은 생각을 못해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안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안 된다고, 못 한다고 생각했을까? 다음 휴가 때는 나도 한번 계획해 봐야겠다. 카리브해까지 못간다면 발리라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보기로 의지적으로 노력한 결과,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 변화된 자신을 만났다. 정말 멋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는가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변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빡빡한 사회 생활에서는 자신을 찾을 수도 없고, 찾는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자유롭게 살았던 뉴욕에서는 그동안 감추웠던 자아가 떠올랐던 것이다.

다시, 더 늦기 전에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나간다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그 동안 해보지 않았던 것도 시도해 봐야지. 나의 한계를 나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 새로운 나의 발견, 가려진 나의 모습을 되찾고 싶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뉴욕에서 발견한, '나다운 나'가 아닐지...  

ps.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가장 큰 수확은 곽아람 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의 책들은 나의 위시 리스트에 넣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작가의 책이라면 모조리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