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생각, 나의 삶

후안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7.2.16
도깨비에는 수많은 인연들이 난무한다. 드라마 상으로 보면 세상에 이유 없는 인연은 없다. 도깨비 신부인 지은탁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는데도 도깨비가 운명을 거역하여 살려준 사람이고,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전생에 악연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전생에 악연이 현생에서 신과 저승사자로 만나 한 집에서 산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 악연이 현생에 부부로 맺어진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천 년 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김선과 도깨비(왕유)도 다시 만난다. 거기에 김선과 도깨비인 김신은 오누이 관계가 아니던가? 이렇듯 전생에 맺어진 모든 연들이 현생에서 얽히고 설켜 또 다른 인연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악연도 그런 악연이 없는 박중헌과 도깨비의 만남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모든 인연들이 현재라는 한 공간에서 전생의 모든 연들을 정리하기 위해 만난다. 그리고 보면 세상에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지금의 내 삶의 모습도 어쩌면 내가 전생에 행한 어떤 행위에 대한 한풀이나 그에 대한 업보는 아닐까?
도깨비가 재미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운명적인 사랑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의 커플은 두 커플이다. 하나는 도깨비와 지은탁이고, 다른 하나는 저승사자와 써니이다. 헌데 두 커플이 모두 신과 인간의 러브스토리이다. 하지만 지은탁과 도깨비의 관계는 단순히 러브스토리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면 조건이 따르기 때문이다. 지은탁의 존재이유는 도깨비 신부가 되어 도깨비의 가슴에 꽃인 검을 뽐음으로 상인지 벌인지 모를 도깨비의 영생을 끝내는 것이다. 그래서 삼신할머니는 도깨비에게 영생을 끝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은탁이 죽는다고. 하나의 객체가 존재이유가 없어졌을 때 그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물건을 쓰다가 그 물건의 효용가치가 다하면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야 할 운명인 지은탁은 수시로 죽음의 사신과 마주한다. 즉 죽음과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지은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삶은 죽음이 있기에 더 위대하다고 하지 않던가. 마치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인 지은탁이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도깨비는 영생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니라, 박중헌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생을 포기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지은탁과 도깨비가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을 때 지은탁은 고등학생이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도깨비와 고등학생인 지은탁, 고 3이라고 해도 나이는 고작 18~19세이다. 아무리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문제가 안된다지만 이건 좀 심하다. 이는 처음부터 지은탁이 도깨비와 사랑하는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도깨비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전 전래동화를 보면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어린 처녀여야 했다. 즉 ‘숫처녀’다. 신에게 바쳐지는 재물은 언제나 곱게 치장하고 마치 신에게 시집가는 형식을 취한다. 바로 그렇기에 지은탁이 도깨비 신부라는 것은 결혼식의 신부가 아닌 바로 재물로서의 신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은탁과 지은탁의 엄마가 도깨비에 의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귀신들이 그 뒤에서 지은탁을 가리켜 도깨비 신부라고 하는 것도 결혼식장의 신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재물로서의 신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현생의 한풀이. 그것이 바로 써니와 저승사자의 만남이다. 반지를 매개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써니는 처음 보는 저승사자에 호감을 느끼고(잘생겨서 일지 모르지만), 이미 기억이 지워져버린 저승사자는 써니를 보자 눈물을 흘린다. 머릿속에 기억은 지워졌지만, 가슴은 그 사랑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생의 기억의 잔상이 현생에도 남아서 떠오르는 것을 우린 데쟈뷰라고 한다. 우리가 간혹 처음 가는 장소인데도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전생의 기억의 잔상이 떠오르는 데쟈뷰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기억의 잔상으로 인해 두 사람은 이유도 모르게 끌리게 되고, 전생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그 고통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그들의 사랑은 다음 생에서 이루어진다. 간절함이 극에 달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써니의 선택은 옮았다. 세 번째 삶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이기에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써니는 저승사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저승사자를 떠나 모르는 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친다. 전생에서의 사랑에 대한 한풀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다음 생에서 저승사자와 써니는 다시 맺어진다. 맺힌 것은 풀리기 마련이다. 다시 맺어진 써니와 저승사자는 4번째 환생이니 그들에게는 마지막 환생이다. 써니는 마지막 생이었고, 지은탁은 두 번째 생이었으니 이 또한 작가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도깨비를 보면서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다.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하자.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학과에 상관없이 교직과목을 이수하면 중등교사 자격증이 발부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수할 교직과목 중 교생실습 과정이다. 4학년 때 이수해야 한다. 나도 교직과목을 신청했기에 한달간 교생실습을 나가게 됐다. 배정받은 학교는 어느 여고였다. 처음 학교에 발령받고 교실에 가서 학생들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 해당 학급의 담임 선생님의 간단한 말씀이 있은 후, 같이 참여한 다른 교생들과 같이 한사람씩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순서였다. 나의 차례가 되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전체 학생들의 얼굴을 한번 쭉 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여학생(K)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앞이 깜깜해지면서 마치 대롱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처럼 그 여학생의 얼굴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은 깜깜한 암흑이었다. 그리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수천마리의 송충이가 기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것도 천천히...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서 무릎이 꺽였다. 휘청하는 나를 옆에 동기가 잡아줘 쓰러지는 것은 간신히 면했다. 순간 분위기가 묘했지만, 대충 자기소개를 끝내고 터질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날의 일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마무리되었지만, 난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내가 느꼈던 그 감성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 학생과 마주칠 기회는 자주 있었지만, 그 날 이후 그 학생의 얼굴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받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떠나서 교생도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인데 선생님이 제자를 보고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그래서였을까? K도 나를 대하는 것이 어색했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전생에 대한 어떤 기억의 잔상이고, 둘째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천지가 예비해놓은 배우자를 마주했을 때 받는 느낌이라고. 어떤 것이 되었던 내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그 굴레가 어떤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었던 간에.
교생실습 기간 동안 학생들과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지금이야 지나간 세월의 흔적으로 인하여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나름 괜찮았다. 기럭지 되지, 얼굴 되지, 몸매 되지. 키는 고등학교시절 전교에서 가장 장신이었다. 거기에 운동을 즐기는 취향으로 다부진 체격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학교에서 인기는 그만이었다. 농담이다. 교생실습기간동안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시절에는 여학교 든 남학교 든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서 치루는 문학의 날 행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날은 금남의 학교이던, 금녀의 학교이던 학교가 개방되었다. 마침 교생실습 기간이 그런 행사를 준비하는 기간이었고, 내가 있던 반에서 준비하는 연대시 낭독에 지도교사로 참석해서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덕인지 교생실습이 끝나고서도 그 반의 학생들과는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분기에 한번정도는 서로 만나서 안부도 확인하고, 식사도 하는 시간들이 꾸준히 이어졌다. 물론 내게 특이한 경험을 선사한 K도 가끔 그 자리에 참석하곤 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나 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관계를 유지하던, 이제는 대학생이 된 예의 그 학생들도 결혼식에 와주었다. 헌데 K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학생들이 조그만 결혼 선물을 준비했다고 연락이 와 만났다. 그때 한 여학생이 내게 K의 것이라며 편지를 한통 전해주었다. 집에 돌아와 열어본 그 편지에는 “ 선생님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헌데 전 선생님의 결혼식에 가서 선생님을 축하해 드릴수는 없었어요” 로 시작했다. 이어서 “선생님을 처음 뵀던 날....” 편지에는 내가 처음 K를 본 날, 내가 받은 충격과 동일한 충격을 K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날의 경험은 나 혼자 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K는 자신의 결혼소식을 친구들을 통해 전해왔다. 그리고 선생님이 꼭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의사와 함께. 결혼식에 갔다. 신부대기실에 들렀다. K는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 선생님 저 이뻐요?” 하고 물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어느 기차역 플랫폼에 서있는 K를 봤다. 차장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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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