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세이/심리/여행

初步
- 작성일
- 2019.10.27
당신이 옳다
- 글쓴이
- 정혜신 저
해냄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십수년전 어느 웹사이트에서 보고 읽게 된 칼럼을 통해서였다. 부부사이 혹은 남녀사이의 역할과 성에 대한 글이라 기억되는데 비정기적으로 올라오는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남자의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기억되던 그녀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국가폭력의 현장에서였다.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현장에 어김없이 그녀가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 강연내용을 묶어 엮은 책 [사람공부]와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를 읽으면서 그녀의 글이 여느 심리학자의 글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 책 [당신이 옳다]를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으면서도 차일피일 하다 보니 이제야 읽게 되었다.
최근 15년간 국가폭력의 피해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저자는, 그 현장에서 심리치유관련 자격증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숱하게 목격했다고 한다. 오히려 현장에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며 그들의 치유를 도운 것은 일반 자원봉사자들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피해자들이 자신을 환자가 아닌 고통 받는 사람으로 보아주길 원하지만 정작 정신과 의사들은 이들의 증상을 중심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전문가들의 심리학이 아닌 적정한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였고, 나와 내 옆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심리학을 일컬어 적정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 책의 부제는 바로 ‘정혜신의 적정심리학’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공감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공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물론, 그런 공감이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기위해서 넘어야 할 허들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모두 아프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힘에 부치는 경우가 있다. 타인과의 관계는 항상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다 퇴직을 하게 되면 무력감에 휩싸이고, 그런 자신을 보면서 당연히 짜증이 늘 수밖에 없다. 남들은 우울증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나 집중을 받지 못하니 아플’ 수밖에 없고, 퇴직 후 겪는 ‘무력감이나 짜증, 피해의식은 우울증이 아니라 우리가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야 할 우리 삶의 고비’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장 절박하고 힘에 부치는 순간에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충조평판을 날리게 되고, 그 사람의 고통에 공감을 하고자 했지만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덧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감을 상처받은 사람들과 마음을 섞고 감정을 공유한 끝에 얻는 깨달음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들은 흔히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 달지 않고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 주는 것을 공감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노동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공감은 감정적 반응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과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게 되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상대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으레 던지는 말은 그것이 공감적인 단어라 할지라도 상대방은 공감 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며,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보라고 한다. 공감은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고 상대방의 존재자체에 내려앉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하면서 내가 공감한다며 던진 말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기보다는 그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찾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공감은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특히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에게도 무한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 상처에 먼저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공감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본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공감을 막는 허들이 된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저자의 글을 읽어나가면서 경쟁과 관계의 갈등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우리사회에서 아프고 지친 이들을 치유하고 관계의 질마저 높여주는 공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게 된다. 또한 나 자신에게도 공감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공감한다는 것이 때로는 무책임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녀가 해주는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말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따듯하게 만들어 준다. 그녀의 말들을 다시금 쓰고 읽으면서 공감 공부를 해야겠다.
‘공감은 상대에게 전하는 말의 내용 자체가 따뜻한가 아닌가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말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말이 어디에 내려앉는 말인지가 더 중요하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향하고, 존재 자체에 내려앉는 말이 공감이다.’(140쪽)
‘너와 나의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너인지 경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너를 공감해야 할 순간인지 내가 먼저 공감을 받아야 하는 건지 알아야 너와 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감을 할 수 있다.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공감에 대한 정확성이 높아진다.’(179쪽)
‘너를 공감하는 일과 내가 공감 받고 싶은 일이 있을 땐 항상 내가 공감 받는 일이 먼저다. 내가 공감 받아야 비로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너를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274쪽)
‘상처를 떠 올리고 말해서 힘든 게 아니라 내 상처가 거부당하는 느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아픈 것이다.’(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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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