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步
  1. 소설 /시

이미지

도서명 표기
9번의 일
글쓴이
김혜진 저
한겨레출판
평균
별점9 (42)
初步


가슴 아픈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외환위기와 국제금융 사태처럼 경제위기를 겪어온 사람들이라면 구조조정이라는 말에 익숙할 터이다. 사실 불경기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기업은 위기가 닥치면 우선 비용절감에 나선다. 가장 손쉽고 눈에 띄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인원감축이다. 대상자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남은 사람들은 안도감도 잠시, 떠나간 사람들의 몫까지 고스란히 떠맡는다. 그만큼 일의 강도는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다음엔 또 다시 남아있던 누군가가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살아야 한다는, 일을 해야 한다는 대명제 앞에 울분은 가슴을 벗어나지 못한다. 회사라는 실체가 보이지 않고 같이 일했던 동료나 상사가 마치 회사처럼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위로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간 수리, 설치, 보수업무를 하던 그는 그 해 여름 부장으로부터 권고사직 권유를 받는다. 이미 저성과자로 분류되어 두 번의 재교육을 받고 세 번째 재교육을 받기 직전이었다. 노후준비를 하겠다며 몇 달 전 대출을 받아 변두리의 오래된 다세대주택을 매입했고, 아내는 마트에서 2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도 있다. 매월 나가는 돈은 한이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회사를 관두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자그마하던 회사가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같이 있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자신이 그만두어야 한다는 이유를 선뜻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부장에게 재교육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3주간의 교육을 받는다. 재교육평가는 최하위였다. 다시금 권고사직을 거절한 그는 타 지역 상품판매 부서로 발령이 난다. 터미널 근처 거점 판매 센터는 그와 같은 인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정해준 지역에서 인터넷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지역이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산업단지임을 알고서 비로소 회사가 자신에게 아무 일도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그는 전신주에 광고지를 붙이고, 공장사람들의 일을 거들어주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숙소를 보수해주며 지내다 두 달째 되던 무렵 박스공장 여자기숙사에 인터넷과 tv결합상품을 판매한다. 인터넷이 잘 안 된다는 말에 보수를 해주던 그는 경고를 받는다. 판매사원은 판매만하고 보수는 수리기사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결국 두 번째, 세 번째 업무 촉구서를 받은 그는 다시 떠밀리듯 지방 소도시 시설팀으로 발령이 난다.

 



그곳에서 근근이 일을 이어가던 그는 휴가를 내고 죽은 친구의 노제에 다녀오지만 다음날 무단결근으로 처리되면서 출근부에서 아예 이름이 삭제된다. 노조에 가입하고 반년이 흐른 뒤에야 본사가 아닌 하청업체 소속으로 변두리 한 소읍의 78구역에 복직하면서 1조 9번이라는 소속과 이름을 부여받는다. 마을 뒷산에 통신탑을 설치하는 현장은 그것을 저지하려는 마을사람들과 대치중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9번이라는 이름으로 9번의 일을 시작한다. 마을사람들과의 대치는 끝이 날줄 몰랐고 노인들과 실갱이를 하다 폭행관련 조사를 받기도 했다. 대치중이던 어느 날 저녁, 그는 트럭에 올라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인다. 로프로 트럭과 몸을 묶은 사람들을 미처 보지 못한 까닭에 이장이 다쳐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이내 숨을 거둔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퇴직을 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왔지만 한 달을 버티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저주하며 증오했고, 그는 그들과 접촉을 차단한 채 오로지 9번의 일에만 몰두한다. 그렇게 그곳에서 1년을 더 버텼고, 그 사이 철탑 5개가 세워졌다. 그가 그곳에서 한 일은 사람의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9번이라는 기계의 일이었다. 인사담당자는 계속 면담을 미루기만 하고.. 그가 비로소 회사의 실체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삼십년이 훌쩍 넘게 회사생활을 하면서 적응이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권고사직 권유이다. 회사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온갖 설이 난무하게 되면 모두들 신경이 날카롭게 서있다. 대상자를 통보받고 며칠을 흘려보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난감하기만 하다. 기한이 다가오면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김차장, 저녁에 약속 있냐?’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그의 눈가가 떨리고 어깨가 처지는 것이 보인다. 저녁 내내 밥은 제쳐두고 술을 마신다. 내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얘기를 들어주고 술친구가 되어줄 뿐이다. 김차장은 자신의 가족과 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나도 안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그가 어렵게 꺼낸 말은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거였다. 아무 말 하지 않던 나는 그 말은 안들은 걸로 하겠다며 자리를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권고사직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회사는 절대 너그럽지 못하다. 잘못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사람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소설에서처럼 아예 일을 주지 않거나, 끊임없는 교육 속에 지각은 물론 교육태도마저 평가하는 것, 그것은 초기 얼마간의 일일 뿐이다. 결국은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지라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그 말 대신 차라리 독기를 품고서 나가기를 원했다. 남아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바라볼 용기가 나에겐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둘 다 독기 없이는 해내지 못할 일이지만, 결국 끝이 정해져 있다면 나라면 어떠할까 생각해본다.

 



점점 괴물처럼 변해가는 소설 속 그를 읽으면서 그를 비난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가슴이 아플 뿐이다. 수많은 그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어느 회사, 어느 현장에선 또 다른 9번들이 그의 전철을 밟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 일이란 무엇이고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소설 속 그는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을 시작하고 그 일이 진짜 일이 되어버리면 누구나가 변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 끝이 어디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어떤 사람으로 변할 것이며, 어디까지 너의 변화를 감수할 수 있겠느냐고..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자신과 힘들게 싸우고 있을 수많은 9번들을 응원한다.

좋아요
댓글
8
작성일
2023.04.26

댓글 8

  1. 대표사진

    初步

    작성일
    2019. 11. 7.

    @시골아낙

  2. 대표사진

    파란자전거

    작성일
    2019. 11. 6.

  3. 대표사진

    初步

    작성일
    2019. 11. 7.

    @파란자전거

  4. 대표사진

    아자아자

    작성일
    2019. 11. 8.

  5. 대표사진

    初步

    작성일
    2019. 11. 10.

    @아자아자

初步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4.5.27

    좋아요
    댓글
    10
    작성일
    2024.5.27
    첨부된 사진
    20
  2. 작성일
    2024.5.27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4.5.27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4.5.5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4.5.5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30
    좋아요
    댓글
    160
    작성일
    2025.5.30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30
    좋아요
    댓글
    150
    작성일
    2025.5.30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28
    좋아요
    댓글
    100
    작성일
    2025.5.28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