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속에저바람속에
  1. ㄴ아무튼, 서평

이미지

도서명 표기
아무튼, 현수동
글쓴이
장강명 저
위고
평균
별점8.9 (14)
흙속에저바람속에

작가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쓴 작가의 에세이에 대한 서평



<아무튼, 현수동>을 읽고



 



 



  지금까지 아무튼 시리즈에서 다뤄진 동네는 단 한 곳, '망원동' 뿐이었다. 망원동을 중심으로 펼쳐진 김민섭 작가의 연대기에서 저자만의 슴슴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내겐 너무 멀고 낯선 동네여서인지 여태껏 '아무튼 서평'은 쓰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현수동> 출간 소식을 듣고도 망원동 때문에(?) 망설였고, 일독조차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한 마음의 고삐를 낚아챈 것은 도서정보에서 미리보기를 통해 발견한 책의 첫 문장이다. "현수동이라는 동네는 실존하지 않는다.(9쪽)" 여기에 더해 글쓴이의 이름 석 자 '장강명'이 독서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포털사이트에 '현수동'으로 검색한 결과, 경기도 안성시에 현수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누가 소설가 아니라고 할까봐, 작가님 너무 하세요!' 왠지 모를 배신감에 책을 덮으려다가 이어지는 단락에서 나의 오해이자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두 권의 에세이 『책, 이게 뭐라고』, 『책 한번 써봅시다』는 진작에 만났으나, 장강명표 소설은 단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그가 쓴 소설들에 자주 나오는 동네가 바로 현수동이였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수동(玄水洞)'은 서울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일대의 가상 공간이면서도 실재하는 현석동의 '현(玄)' 자와 신수동-구수동의 ‘수(水)’ 자가 합쳐진 이름을 갖고 있다. 



  현수동은 그가 만든 세계인 동시에 그를 만든 세계이기도 하다. 실제로 광흥창역 주변에 살기도 했거니와, 특히 현석동에서 살 때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문학상을 받으면서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작가로 정식 데뷔를 한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이에게는 현수동이 작가에게 좋은 기운을 안겨준 곳은 맞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동네에 책 한 권 분량만큼이나 가치를 부여하다니 너무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으리라. 이에 저자는 단호하게 응답한다. "어떤 동네를 오래 상상하고, 계속해서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 그곳을 움직이는 힘을 궁리(12쪽)"하는 일은 유의미하다고.



 




국가나 역사가 아니라 거리의 아침을, 골목의 저녁을 상상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거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 표정들 아래 자리한, 어떤 한 기관이 일괄 조율할 수 없는 복잡한 욕망의 부글거림도. 그런 사실을 깨달을수록 그 골목과 거리를 모두 포괄하는 깔끔한 이념은 그만큼 더 불가능하게 여겨진다.(15쪽)




 



  전직 정치부 기자다운 필치로 저자는 역사속의 한 정치가를 소환하여 묻는다. "레닌, 당신은 어떤 동네에서 살고 싶었나요?" 역사가 보여주듯 그는 국가라는 틀에서 지상낙원을 꿈꿨지만 국민들 개개인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반면 저자가 그리는 현수동은 별세계가 아니라 현실처럼 별의별 사람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 갈등하고 대립할지라도 최소한의 선의와 정의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을, 더불어 그들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는 동네를 상상해보자고 그는 말한다.



  저자가 눈품과 손품 그리고 발품을 들여 찾아낸 현수동의 역사, 인물, 전설, 밤섬, 교통, 상권, 도서관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듣다보면, '광흥창역 일대의 꿈이고 가능성(17쪽)'인 현수동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고려 때부터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였던 광흥창이 조선시대에는 그 일대가 한강의 서쪽에 자리하여 '서강'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현석동과 밤섬공원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오래된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현수동의 풍경을 저자가 옛 선비들이 지은 시에 빗대어 표현한 것을 읽노라면 마치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듯한 기분이 든다.  



 




서강팔경



(서강 지역 관광 필수 체크포인트 8)



 



栗島明沙

밤섬의 깨끗한 백사장

籠岩暮煙

현석동 사람들이 집에서 저녁밥을 지을 때 피어 올라가는 연기

牛山牧笛

와우산에서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

麻浦歸帆

마포나루로 돌아오는 수많은 돛단배의 모습

楊津落照

양화나루 위로 붉게 물든 하늘과 노을

冠岳晴嵐

관악산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龍虎霽月

용산 쪽으로 저녁에 뜬 달

放鶴漁火

샛강에서 밤낚시 하는 등불



(32~33쪽)




 



  대개 역사는 크고 뛰어난 인물을 기억하고 또 남기는 법이다. 광흥창역 일대를 주름 잡았던 옛사람들 중에도 이름난 권력자나 학자, 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곳에서 일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 이를테면 대장장이, 메주를 만드는 소년 소녀, 밤섬에서 일하는 일꾼들, 신수동에서 돼지를 치거나 공장의 여공들과 그들을 기다리던 남친들에 주목한다. 그리고는 현수동 곳곳에 고개를 들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 키 낮추어 친근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눈을 맞출 수 있는 조각상을 세운다. 또한 광흥창역 일대에서 살 때 민담이나 설화의 배경지를 훑고 다녔던 그는 비록 미신을 믿지 않지만 그와 관련된 장소와 풍습이 현수동을 한층 더 넉넉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놀랍게도 현석동 시절을 그리워하는 저자와 달리 그의 아내는 그곳을 언제든 떠나길 바랐다고 한다. 차도와 인도가 분리되지 않은 이면도로와 비탈길로 인해 출근길이 불편했던 아내에게 저자는 이번에도 현수동만의 해법을 제시해보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점 하나를 발견해낸다. "애초에 사람들의 집과 직장이 왜 그토록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96쪽)" 그는 '자동차'를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자동차가 일과 삶의 공간을 멀어지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곧 일과 삶의 의미가 좁고 작아짐을 뜻한고 지적한다. 아울러 현수동에는 가속하는 자동차 대신 저속으로 달리는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 많기를 소망한다.



 




논을 벼의 재배지가 아니라 인공습지로 바라볼 때 비로소 논의 홍수 조절 기능이나 지하수 수질 정화 기능, 주변 땅의 온도와 습도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된다.(121쪽)




 



  물론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마음껏 교감하려면,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대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치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을 저자도 모르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논을 단순히 벼의 재배지가 아니라 인공습지로 여길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수동의 상권과 공공도서관 역시 지역공동체로서 마을의 개성을 살리고 각각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더하는 방향을 추구한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나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을까 싶다.



  저자를 따라 현수동이라는 시공간을 거닐다 보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또 가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왠지 모르게 현수동이 광흥창역 일대의 미래로만 보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품은 동네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현수동이라는 무대가 작가의 소설들 속에서 여러 차례 그려졌거나 곧 그려질 예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어느 독자에게는 <아무튼, 현수동>이 작가노트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이 새롭게 보이거나 앞으로 확장될 세계관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나처럼 뒤늦게나마 그의 소설을 한 권씩 기꺼이 읽고 싶게 만들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임에는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나 최근에 나온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원청』에 대한 추천사를 쓴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장강명 작가이다. 위화가 현수동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떠한 추천사를 써줄지 문득 궁금해진다. 소설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원청은 잃어버린 도시이자 주인공 린샹푸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곳에는 현재의 삶을 살아내면서 조금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과 이야기가 함께 숨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저자가 상상하고 사랑해마지 않는 현수동도 원청의 이미지와 닮은 듯하다. 이세상 어딘가에는 현수동을 닮은 동네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과 기대를 해본다. 그때까지 아쉽지만 현수동을 닮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아무튼, 현수동>으로 달래야겠다.



 


좋아요
댓글
5
작성일
2023.04.26

댓글 5

  1. 대표사진

    ne518

    작성일
    2023. 1. 29.

  2. 대표사진

    필리아

    작성일
    2023. 1. 29.

  3. 대표사진

    추억책방

    작성일
    2023. 1. 29.

  4. 대표사진

    cOcOgOOn

    작성일
    2023. 1. 29.

  5. 대표사진

    Joy

    작성일
    2023. 2. 12.

흙속에저바람속에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5.6

    좋아요
    댓글
    1
    작성일
    2025.5.6
    첨부된 사진
    20
  2. 작성일
    2025.5.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4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5.5.2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2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01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8
    좋아요
    댓글
    61
    작성일
    2025.5.8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18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