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세쯔
- 작성일
- 2019.3.24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
- 글쓴이
- 곽한영 저
창비
동화에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무엇이 있다.
다 커버린 지금 읽으면 차별적으로 고정된 성 역할 따위가 눈엣가시처럼 걸리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으니 여전히 동화는 '싫어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동화작가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계기로 특정 동화를 쓰게 됐는지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동화 속에는 모험과 보물, 사랑과 선의 승리가 가득하지만 정작 동화작가들 자신의 삶은 슬프거나 구차하고, 천박하기도 하다. 동화가 순수한 아이들의 이야기인 것과 달리 정작 동화작가는 아이들의 세계를 갈망하지만 거기서 영원히 쫓겨나버린 어른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해외에 거주하던 시절 해외의 동화 '초판본에 근접하는' 고서를 수집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초판본 수집보다는 책을 읽는 게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했지만 아마 여건이 되었다면 초판본에 근접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초판본 그 자체에 눈독을 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는 저자가 수집하게 된 양장본 책들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닳았을지언정 시간이 무색할 만큼 말끔해서 많은 주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 책들이 예쁘게 여겨지거나 갖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난 그저 읽기 좋게 잘 편집되고 총 천연색의 그림이 들어간 이 시대의 동화책이 더 좋다. 그리고 그런 비싼 책 한 권에 들어가는 값으로 책을 여러 권 살 터다.
이렇게 온 집안의 노새처럼 부려지는 가운데서도 올컷은 문학에 뜻을 두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일 것입니다. 네 자매 가운데 유독 자신을 싫어하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는 역설적인 욕망이 강하게 작동했겠지요. 허영기 섞인 아버지의 교유 관계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 올컷의 집엔 에머슨, 소로, 호손과 같은 당대의 거인들이 드나들었고 올컷은 그들만의 리그에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온갖 집안일로도 모자라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해 삯바느질, 가정 교사 등 돈이 되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도 올컷은 꾸준히 글을 써서 잡지에 기고하며 전업 작가를 꿈꾸었습니다.(p. 35)
맨 처음 실린 동화작가는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이다. 동화작가들의 삶까지 동화 같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올컷의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프고 마음 아팠다.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 가운데 둘째 조가 올컷 자신을 투영시킨 인물인데,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씩씩한 점 등은 닮았으나 조가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것과 달리 올컷은 그렇지 못했다. 무능하고 천박한 데다 이기적인 아버지 밑에서 올컷은 온갖 구박을 받는다. 병을 앓는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떠맡고 그도 모자라 삯바느질에 가정교사 일 등등 돈을 벌기 위해서도 모진 애를 쓴다.
그러다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자 온 가족이 거기에 달려든다. 괘씸할 만도 하건만 올컷은 가족이 진 빚을 갚고 집도 더 넓은 곳으로 옮기는 등 가족에 헌신을 다한다. 그러다 올컷이 56세가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임종의 순간을 맞으며 올컷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고, 올컷은 이틀 뒤 스스로 목을 맨다.
그 외에도 여러 작가들이 있는데 마크 트웨인은 재수없었고, 루이스 캐럴과 안데르센은 혐오스러웠으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보물섬>의 성공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초록지붕집의 앤>의 작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올컷 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안타까웠다.
그들 작품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환상 세계와 그들 삶과의 간극이 더욱 컸다. 제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창조했다한들 막막한 사막 지평선에 일렁이는 오아시스의 신기루나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무지개의 끝자락처럼 동화의 세계는 그들에게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간극의 너비를 확인하는 일은 나로 하여금 동화 세계와 현실 세계의 차이를 깨닫게 하는 과정인 동시에 나 역시 아이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존재임을 슬프게 재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즐겁지도 순수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은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어른은 의식주를 비롯한 삶의 조건들을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에게 기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어깨에 짊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서도, 만만하게 보여서도 안 되는 가면 놀이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지옥이 되고 삶은 거짓의 성채로 변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죽음과 동일시됩니다. 성장이 종내에는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자연적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이라는 세계가 붕괴한다는 점에서 한 시기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피터 팬이 거부하는 것은 어른이 되는 것, 그 세계가 의미하는 수많은 악의 그림자, 그리고 죽음 그 자체입니다.(p. 133)
여러 권의 책에 대해 다루는 경우 내가 모르는 작품이 나오면 흥미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은 모두 어릴 때 접해보았거나 익히 아는 것들이라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동화의 내용을 적절히 상기시키는 동시에 해당 동화에 영향을 끼쳤을 만한 동화작가 일생의 면면 또한 알맞게 소개하고 있어 지루하지도 않았다. 판본마다 다른 삽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고 고서를 얻기까지의 과정도 짤막하게 들려주어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다른 동화에 대해 다루는, 저자의 책이 또 나오면 좋을 것도 같다.
소설가가 훌륭한 작품 하나를 써낼 때마다 다차원 우주 어딘가에서 그 작품 세계가 실제 세계로 탄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는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지만, 그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끝났을 뿐 계속해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슬프고 비극적인 세계가 존재하게 되리란 것이 무척 안타깝지만, 반면에 동화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세계도 있으리란 생각이 위안을 준다. 물론 어느 세계이든 간에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고비를 넘어야 하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험난한 산을 넘은 다음에 또 다시 가시밭길이 펼쳐지는 하드보일드한 세계보다는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꽃밭이 펼쳐진 작은 모험과 작은 기쁨이 가득한 세계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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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