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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글쓴이
도로시 길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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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8.6 (56)
세쯔

007 제임스본드 같은 스파이 영화의 호쾌한 액션은 쌓였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보내주곤 한다. 나라면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아 절대로 하지 못할 일들을 대범하게 잘도 해낸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농담을 하고, 사건을 척척 해결해 나간다. 멋있다! 내가 하지 못할 일들을 거뜬히 해내는 이들을 보면서 하지 못함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모양이다. 게다가 그들의 상황과 거기서 오는 근심을 보자면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작디작은 고민들은 우스워 보인다. 스파이들의 고민은 목숨이 위태로워지거나 도망자로 쫓겨야 하거나 아끼는 사람들 혹은 아끼는 것들을 잃게 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로 끙끙 앓는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소시민 중에서도 지극히 소심한 소시민이다. 나는 돌발상황을 맞닥뜨리거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황도 너무너무 싫어해서 스펙터클한 모험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러니 나처럼 평범한 소시민이 모험을 즐기는 데에는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한 간접 체험이 제격이다. 이번의 모험은 젊은 시절 스파이를 꿈꾸었으나 백발 성성한 나이가 되어서야 스파이로 나선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이 나 대신 활약해 주었다.


폴리팩스 부인은 봉사활동 모임 등으로 하루하루를 소진하며 시간을 보내는 노부인이다. 그녀는 약한 우울증을 앓다가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했던 일들을 하라고 권하는 의사의 말에 따라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무작정 CIA를 찾아가 스파이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정말 운 좋게 첫 임무를 맡게 된다. 그것은 멕시코에 가서 한달동안 관광객으로 여행을 즐기다가 어느 서점에서 주인에게 어떤 물건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임무였다. 즐겁게 관광을 하다가 약속한 날 서점에 가지만 납치를 당하고 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부인은 한 남자와 함께 붙들려 다리에 족쇄를 찬 채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리고 낯선 곳의 감옥에 갇혀 버린다. 부인을 납치한 놈들은 부인이 그 물건에 대해 아는지 의심하지만, 부인의 꾸밈없는 외모와 솔직담백해 보이는 말투, 성격에 속아 단순한 여행객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함께 붙들린 남자 패럴은 줄곧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스파이였으므로 그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려 하나 큰 상처만 입고, 그에 대한 고문은 미뤄진다. 패거리의 대장이 자리를 비운 동안 부인은 패럴과, 이름 모를 옆 감방의 죄수를 데리고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용건이......? 소개서에는 부인이 동네 원예클럽 소속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계시다고 적혀 있는데요."

"아니, 사실은 그에 아니라......" 폴리팩스 부인은 황급히 끼어들고는 주변을 살폈다. 문이 꼭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한 부인은 메이슨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인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네 스파이 활동에 대해 상의할 게 있어서 말이지."

메이슨은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폴리팩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스파이 필요 없으신가?" (p. 22) 


책 뒤쪽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옮긴이는 이 책을 코지 스파이 스릴러물로 칭하고 있다. 코지 미스터리는 들어보았지만 코지 스파이 스릴러는 처음인데, 소설의 내용상 미스터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서 코지 스파이 스릴러라는 명칭이 훨씬 가깝게 와 닿는다. 보통의 스파이 스릴러물보다는 가볍고 잔혹한 장면이 적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실제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될 듯한 일들이 발생한다. 살인사건은 발생하지만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 소설의 배경 정도로만 사용된다. 또한 악당들이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기 위해 주인공을 납치하지만 심각하게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악당들인데 '착한 나쁜 놈들'이다. 선량한 노부인과 친해지고 싶어서 자꾸 말을 걸고 아픈 허리 마사지를 부탁하기도 한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을 읽으라며 주기도 하고 함께 파티도 한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너무 심각하고 우울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다면 이처럼 유쾌하고 재밌는 모험 이야기도 또 없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며 살아야겠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으니 가끔은 가벼워지는 것도 좋은 법이다.



 

부인의 짐작이 들어맞았다. 서랍 안에는 실탄과 탄창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전부 포장을 벗긴 채로 바로 쓸 수 있는 상태였다. 부인은 서랍을 닫은 뒤 열쇠에 손을 댔다. 그런 다음 잠시 망설였다.

못 해. 암울한 생각이 떠올랐다. 난 못 하겠어. 룰라시가 화를 입을 수도 있어. 그건 공정치 못하지. 열쇠가 사라지면 분명 혼이 날 거야. 벌을 받을 거야. 룰라시는 패럴의 다리뼈를 맞춰줬고, 이제 브랜디와 아스피린도 줄 텐데,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순 없어. 아, 나는 스파이로선 완전히 실패로군.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파이가 되려면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한다는 걸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데...... 이자들이 날 죽일 작정인데도 나는 열쇠 하나, 실탄 하나 훔칠 수 없어. 날 도와준 사람이 벌을 받을까 봐. (p. 146)

 


착한 사람들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평소 자신이 지켜왔던 선을 넘지 못해 피해를 입곤 한다.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인데도 감금 상황에서 조그만 편의를 봐준 것에 정을 느껴 물건을 훔치지 못한다. 내가 부인의 상황이었다면 고민은 했겠지만 그래도 총알이나 열쇠를 훔쳐냈을 것이다. 다리뼈를 맞춰주고 아스피린을 주더라도 나의 죽음에 항의하거나 대신 죽어주는 건 아닐 테니까. 문제는 훔치는 순간 느끼는 두려움과 들킬 것이 두려운 마음이다. 내가 어떤 심정이 될는지, 오금이 저려 주저앉지나 않을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하지만 대담한 부인은 두려워하기 보다는 다른 걱정을 먼저 한다. 이렇게 선한 사람이니 악당들도 감복해서 파티도 열어줬겠지, 라고 생각하고 싶으나 어디 현실이 그런가. 착하다고 해서 돌아오는 이득따위 없는 세상이다.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지. 그러니 착하게 살더라도 필요한 순간에는 단호하게 행동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망설이던 부인도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총을 발사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사람을 죽였지만, 그렇다고 부인이 나쁜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고, 그런 단호함이 부인과 일행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은 1966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이다. 출간된 지 50년이나 지났지만,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 같지 않은 느낌이다. 아마 아직도 냉전 시대의 독특한 사회적 분위기가 수많은 이야기들에 영감을 주고 있어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스파이들의 활동은 축소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각 국가들의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의 이익 추구는 여전하고, 서로 반목하는 국가들도 많으며, 테러가 비일비재한 시대라 스파이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활동은 지금도 위험할 것이다. 뉴스에서 접할 일이 없어도 누군가는 악당의 손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먼 미래,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질 정도로 전 인류가 서로를 가족처럼 아끼는, 서로를 염탐할 일이 없을 시절에는 스파이도 사라지겠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과거를 훑기만 하는 데서 멈추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부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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