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세쯔
- 작성일
- 2016.12.22
레이디 수전 외
- 글쓴이
- 이봉지 외 1명
시공사
내가 책의 물성을 좋아한다는 것을 외면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한눈에 푹 꽂혀서 세트를 단번에 지를 줄은 몰랐다. 자고로 세트는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심사숙고해서 지르는 게 아니던가! 더욱이 나는 꽃으로 가득한 패턴에 열광하는 사람도 아니건만, 이 캐스키드슨 패턴의 제인 오스틴 책은 막상 보기 전까지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캐스키드슨 특별 에디션은 국내 최초의 제인 오스틴 전집으로서 그간 출간된 적이 없던 작품들까지 끼어 있었기에 아름다운 책의 만듦새와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겠다. 제인 오스틴 팬이건 아니건 간에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이 훌륭한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레이디 수전 외》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왓슨 가족>, <샌디턴>의 세 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제인 오스틴의 팬이라면 당연히 구입해야 할 책일 것이다.
레이디 수전은 딸이 하나 있는 과부로 런던에서 유부남과 바람을 피운다. 그러다 그 일이 문제가 되자 시골 시동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녀는 우아하고 고상한 귀부인으로 행세하지만, 시동생의 아내인 버넌 부인은 겉과 속이 다른 수전을 꿰뚫어본다. 하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수전의 겉모습에 속는다. 특히 버넌 부인의 남동생 레지널드는 정신없이 빠져버린다. 잘되어가는 듯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수전이 딸 프레더리카의 남편감으로 점찍어 둔 제임스 경이 방문하면서부터 삐걱거린다. 제임스 경을 싫어하는 프레더리카가 레지널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 일로 수전과 레지널드는 말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수전은 레지널드를 잘 달래어 기분을 풀어주고는 런던으로 가서 방탕하게 놀 계획을 짠다. 런던에 간 수전을 뒤따라간 레지널드는 수전과 바람을 피우는 남자의 아내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수전과 헤어진다. 런던 생활이 맞지 않는 프레더리카는 다시 작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수전은 딸과 맺어주려던 제임스 경과 결혼한다.
사실 난 그 결혼이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 그가 내 능력을 알게 만들었지. 그리고 지금은 나를 싫어하려고 작정을 하고는 내 모든 과거 행동에 안 좋은 편견을 가졌던 사람을 정복해서 아주 즐거워. 그러니까 바라건대 그의 누나는 내 단점만 늘어놔봤자 별로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어. 내 지성과 태도는 그 주장과 정반대니까 말이지. 내가 차츰 자기 남동생의 호의를 얻으니까 그 누나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빤히 보여. 그리고 누나 입장에서는 나 같은 인물이 절대로 기분 좋을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지. 하지만 나에 대한 누나의 의견이 정당한지 여부를 남동생이 일단 의심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동서에게 도전한 셈이지. (중략) 처음부터 계산된 행동이었지. 아마 지배욕이 가장 컸겠지만, 평생 이렇게 요염하게 군 적이 없어. 나는 감정과 진지한 대화로 그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상투적인 추파 던지기따위 없이 '반쯤은' 나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 (p. 30)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제인 오스틴도 10대 시절부터 글을 썼다. 그런 작품이 <레이디 수전>인데, 10대에 썼는데도 제인 오스틴 특유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빛난다. 그리고 그간 보아온 제인 오스틴의 작품 속 주인공들과 달리 나쁜 여자라고 할 만큼 독특한 성격의 여자가 주인공이다. 당당하고 똑똑한 엘리자베스나 이성적이고 참을성 많은 엘리너,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메리앤도 매력적이지만 레이디 수전도 그에 못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인 것은 확실하다. 수전은 악당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착한 프레더리카보다 더 응원하게 된다. 아마도 소극적이고 주눅든 캐릭터보다 조금 약아도 당당한 캐릭터가 더 매력적인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수전이 과부로서 살아가는 시대적 환경이 안타깝기도 한 탓이다. 이 작품은 서간체로 씌어 있어 캐릭터 간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연히 드러나서 더욱 흥미진진하다. 그러니 등장인물들의 편지 왕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급하게 마무리된 듯한 결말은 무척이나 아쉽다. 편지 왕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프레더리카가 성장하며 마음 속에 감췄던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으로 잘 마무리되었더라면 이 작품도 <오만과 편견>만큼이나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왓슨 가족>은 이모의 집으로 입양되었던 에마가 이모의 재혼으로 인해 왓슨 가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모의 가르침에 의해 우아한 숙녀로 자란 에마는 무도회를 앞두고 큰 언니에게서 형제자매들과 이웃들에 관한 소식을 전해듣는다. 언니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아예 발길을 끊게 만든 자매나, 부잣집 딸에게 마음을 빼앗긴 오빠의 이야기, 그리고 마을 아가씨들에게 잔뜩 호감을 사고 있는 바람둥이 톰 머스그레이브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무도회에 간 에마의 앞에 톰 머스그레이브와 오스본 가문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오스본 경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청년, 머스그레이브는 소문처럼 잘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정작 에마가 마음에 둔 사람은 언니가 안중에도 없던 목사 하워드였다. 하지만 오스본 경과 머스그레이브가 에마에게 관심을 표시하고, 집을 떠나 있던 다른 자매들과 친척들이 찾아오는 등 에마의 주변이 북적인다.
때마침 톰 머스그레이브가 합석하면서 에마는 먼저 자리를 떠난 것을 에드워드 부인에게 사과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를 모면했다. 톰은 에마 왓슨 양에게 직접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달라고 에드워드 부인에게 청했다. 그 선량한 부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차가운 태도로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 에마에게 자신의 춤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청했다. 에마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봐주는 게 기분 좋긴 했지만, 톰 머스그레이브와 같이 춤을 출 마음은 없었기에, 선약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하면서 통쾌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는 그녀의 거절에 깜짝 놀라 동요하는 듯했다. 조금 전 그녀와 춤을 추었던 어린 파트너를 보고 누구나 신청만 하면 다 받아주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p. 140)
<왓슨 가족>은 제인 오스틴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제인 오스틴의 언니 카산드라가 조카들에게 들려준 짤막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야기가 제대로 다듬어지고 마무리됐다면 어떨는지 모르겠으나 <레이디 수전>이 워낙 인상이 깊은 작품이었기 때문인지 그다지 재미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에마 왓슨이라는 주인공이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특징적인 면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양성 불평등 사회'의 여성들의 모습이다. 직업을 자유롭게 가질 수 없으므로 '좋은' 결혼을 하기 위해 사교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다른 작품에서와 같다. 에마를 보기 위해 집에 들른 오빠 로버트는 에마를 가리켜 '이모가 정말 예쁜 작품을 만들었어!'라면서 물건 취급을 하고, 유산은커녕 땡전 한푼 없이 돌아온 동생을 짐짝으로 여긴다. 아마도 평소 제인 오스틴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인식이 나이가 들면서 좀 더 날카롭게 벼려지지 않았나 싶었다.
마지막 작품 <샌디턴>은 제인 오스틴이 사망하기 전까지 집필하던 작품이라고 한다. <샌디턴>은 영국 남부에 있다고 설정된 가상의 해안 마을로서, 이 공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져서 흥미롭다. 샌디턴을 개발하는 데 열중하는 파커 씨와 그 부인이 런던을 다녀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 가벼운 마차 전복 사고를 당한다. 이들을 도와준 헤이우드 가족은 파커 씨 부부와 친밀해지고, 급기야는 헤이우드 가의 장녀 샬롯이 파커 씨 부부와 함께 샌디턴으로 향한다. 샬럿은 샌디턴의 터줏대감 격인 데넘 부인과 그녀의 재산을 보고 주변을 맴도는 세 부류의 친척들, 데넘 부인을 돌보며 함께 거주하는 친척 클라라 양, 그리고 파커 씨의 누이들과 남동생 등의 인물들과 얽힌다. 현명한 샬럿은 이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성격의 특징적 부분들을 금세 파악한다. '치사하고 인색한' 데넘 부인, 재산을 거머쥔 데넘 부인 앞에서만 굽실거리는 데넘 부인의 사망한 두 번째 남편의 조카 데넘 양, 건강염려증 환자로 보이는 파커 씨의 누이들과 남동생 등 인물들 모두가 무척이나 유별나다. 파커 씨의 누이 다이애나 파커의 노력으로 샌디턴에 기숙학교의 세 아가씨들이 인솔자를 따라 머물게 된다.
그 반대쪽에 앉은 젊은 여성은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파커 씨 집의 응접실에서 본 데넘 양은 매우 냉랭하고 거만했다. 입을 꼭 닫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면 마지못해 몇 마디 응대를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데넘 부인의 곁에서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미소 띤 얼굴로 주의 깊게 경청하면서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데넘 양의 온도차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풍자적 관점에서는 매우 재미있고,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슬펐다. 샬럿은 데넘 양의 성격에 대한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에드워드 경에 대해서는 좀 더 관찰이 필요했다. 그는 파커 씨 일행이 다가가자 바로 클라라 곁에서 떠났다. 그러고는 모두 함께 산책길에 나서자 오로지 샬럿에게만 관심을 집중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샬럿은 적잖이 놀랐다. (p. 232)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특별한 성격과 목적을 지니고 있어 <샌디턴>은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준다. '치사하고 인색한' 데넘 부인의 재산을 둘러싼 친척들의 아부가 어떻게 작용할지, 그래서 데넘 부인이 누구에게 재산을 물려주게 될지도 무척 궁금해질 뿐더러 데넘 부인이 돌봐주는 착한 클라라 양이, 샬럿은 '바보 같다고' 생각한 에드워드 경과 어떤 사이가 될지도 기대된다. 또한 파커 씨의 형제자매들은 병약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분주하게 움직이거나 게으른 탓에 거기에 편승하거나 하는 등 희극적인 인물들이어서 재미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고 진짜 이야기가 펼쳐질 즈음 끝나버린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다들 하던 일을 말끔히 마무리짓길 원할 텐데, 이런 재미난 작품을 놓아두고 숨을 거둔 제인 오스틴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분명 작품의 줄거리와 인물들을 떠올리면서 꽤나 재미있어 했을 듯한데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작품 중 한 편은 결말이 있고, 한 편은 제인 오스틴에게 결말에 대해 들은 것을 언니 카산드라가 조카들에게 들려준 바가 있어 그것이 기재돼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편은 그것조차 없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앞선 두 편의 결말도 허술하게 처리된 느낌이라 세 편 모두 마무리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무척 아쉬우면서도 이렇게나마 접하지 못했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다만, 출간된 적 없던 작품의 출간과 캐스키드슨 패턴의 아름다운 표지 디자인의 두 가지 뛰어난 장점을 매끄럽지 못한 번역과 생각보다 많은 오탈자가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부디 다음 중쇄할 때는 두 가지 장점에 어울리는 완벽한 책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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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