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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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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글쓴이
구병모 저
자음과모음(이룸)
평균
별점8.7 (65)
나나

 


 구병모, 파과 -  본연의 슬픔으로 돌아가 긴 울림만이 남아 


 


 


  소설 <파과>에는 60대 노부인 킬러가 나온다. 60대 노부인 킬러. 잘 어울리지 않을 단어들을 골라서 나열해 놓은 것 같은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내 구미를 돋우었는지는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으잉? 할머니가 킬러라고?


 


  놀라서 집어든 책에는 조각(爪角)이 나왔다.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노구의 몸으로 지금도 현장을 뛰는 그녀. 방역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분명히 살인이다. 무려 40년의 세월동안 목표물로 지정된 수많은 사람들을 단숨에 처리하며 어느덧 그 바닥에 ‘대모’ 자리까지 오르게 된 조각. 그러나 이미 몇 번이고 언급했듯이 그녀는 이제 늙었다. 키우고 있는 무용의 밥을 줬는지 어쨌는지, 사왔던 복숭아는 다 먹었는지 어쨌는지, 그녀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움직임도 느려졌고 사소한 실수가 늘어간다. 몸 여기저기서 삐걱거린다.


 


 






 

  예전이라면, 그래, 혈관은 싱싱하고 팽팽하여 그것을 타고 새로운 피가 끝없이 순환하며 살갗은 탄력이 넘쳐서 내던져도 멍들지 않는 사과 같던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 피 따위 진작 멈췄을 것이며 이런 상처는 긁힌 정도일 뿐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기 전에 이 일 자체가 피를 볼 만큼 위험한 방역 축에도 들지 않았을 터였다……. 어디까지나 예전이라면. 75p


 



 


 


  그러나 달라진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냉혹한 킬러로 한 평생을 살아온 여자에게는 지금껏 없었던 일들이 생겨난다. 목표물을 제거하려는 중요한 순간에 도로위에 퍼져버린 리어카 노인을 돕는다거나,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졌다는 장박사를 떠올리며 그도 나도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202p) 서글픔을 느낀다거나 사랑스러운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209p) 생각한다거나. 어쩌면 강 박사를 향한 모종의 열망(209p) 까지도.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176쪽)


 


 


 


  조각의 이런 노화와 쇠잔의 표지를 조각보다 더 날카롭게 알아채고 예민하게 받아들인 자가 있는데, 그게 바로 투우다. 30대 초중반의 나이로 조각이 보기에는 코흘리개에 불과한 그는 신속, 정확, 치밀한데다 서비스 정신까지 따려 있는, 에이전시 손 실장이 지금 한창 아끼는 방역업자다. 얼핏 보아서는 천진하고 시시껄렁하게 말장난이나 하는 것 같지만 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조각에게 접근해왔다. 조각의 일을 처리하려는 현장을 지켜보거나 고의적으로 그녀의 일에 끼어들어 방해를 하면서. 미행이라도 한 듯 그녀가 있는 곳에 불쑥 나타나 그녀를 들볶기까지. 이상하리만치 조각에게 집착하고 끼어드는 투우의 행동이 궁금증을 유발하며 소설을 더 흥미진진하게 했다. 그가 그녀를 점점 더 몰아갈수록 긴장감은 상승하며 책의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갔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상황에 왜 사람을 돕는데? 인지상정? 인간에 대한 예의? 나가 죽으라고 해. 언제 그런 거 챙기고 살았는데?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까 생판 남을 봐도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당신이 이날 이때까지 해온 일과 살아온 방식을 생각하면 그거 너무 뻔뻔하지 않아? 215p


 


 


  “목적. 글쎄, 내 목적이 뭘까요.”


  투우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귤을 짓밟자 터진 귤 냄새가 골목 안을 흥건하게 적시고 퍼져 나간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꼭 남더러 갈 곳을 끈질기게 묻더라. 당신 지금 자기가 뭐 하고 있는지 정말 알기나 해? 아는 건 단 하나, 목적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지.” 218p


 


 


 


  조각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투우와 과거 회상 속에 존재하는 류(그녀를 방역업계로 이끌고 가르쳤다). 그 둘을 통해 조각의 과거와 현재를 다 볼 수 있다. 젊음과 늙음, 한 인간의 생 모두를. 소설은 특수한 상황의 한 인간이 노화되어 보통의 노인들과 다름없어진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고 있음은 물론 노인과 여자라는 두 가지 조건 아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이나 바람직해보이지는 않는 생각들에 대한 지적도 놓치지 않았다.


 


  누구나 늙어가며 죽음을 향해 간다. 그 점에서 <파과>는 깊은 공감을 살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살인병기였던 한 존재가 비로소 진정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을 때, 그녀의 직업을 잊고, 윤리적으로 라거나 리얼리티라거나 따져 물을 수 있을 문제들을 다 떠나서 본연의 슬픔으로 돌아가 긴 울림만이 남아 있었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지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222p


 


 


 


  제목인 파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흠집난 과일(破果)과 빛나는 시절(破瓜). 이 두 가지의 뜻이 조각의 늙은 손톱 위에 얹어진 화려한 인조손톱의 이미지와 맞물려 엔딩까지 완벽한 소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덧붙이자면. 길고 긴 문장들이 인상 깊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바닥까지 파고들듯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개인적인 취향과는 정말 잘 맞았다. 속사포 랩이라도 하듯 한번에 아주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전혀 지루하지도 벅차지도 않았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더 읽어보고 싶다.


 


 


  -花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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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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