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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ddong
- 작성일
- 2020.10.21
코리안 티처
- 글쓴이
- 서수진 저
한겨레출판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었던 소설이었다. 한동안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과
이야기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코리안 티처>를 읽고나서 알 수 있었다. 여태껏 읽었던 소설은 대부분 주인공이
남자였고, 작가도 남자였다. 이런 소설에서 여성은 남자 주인공의
조력자나 연인 같은 주변부 인물로 잠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실제 내 삶에서 나는 주인공이며, 삶이 끝날 때까지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 뿐인가. 남자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이야기 속 여자들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인 듯하다. 이런 여성들 역시 실제 나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현실 세계 속 나는 사랑에 목숨걸지도 않으며, 삶에 여유가 없어서 사랑을 자주 포기한다. 아예 내 삶 속에 사랑이 없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반면에 이 책, <코리안 티처>은 여성의 시선으로 쓴 여자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남성 소설의 한계가 완벽하게 제거된 '진짜' 여자들의 이야기라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코리안 티처>의 주인공은 H대 한국어 어학당에서 일하는 네 명의 여자들이다. 그들은 주인공이라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지 않고,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는 여자 캐릭터를 대신해 남자 인물들이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소설에서 남자들은 달랑 세 명만 등장한다. 기껏 등장한 남자들은 여자의 남자친구 또는 남편으로 잠시 존재할 뿐이다. 작가는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남성을 배제시킨 채, ‘이 중에 너 같은
여자가 한 명은 있겠지’ 하는 심보로 주인공들 이외에도 각양각색의 성격을 지닌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킨다.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안절부절 하는 여자, 불의와 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여자,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여자, 모두에게 인기가 좋은 여자, 인기 많은 여자 옆에 찰싹 붙어 친한 친구 행세를 하는 여자, 남의 눈치를 엄청 보는 여자, 자기 일에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여자,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뭐든 하는 여자, 잘 꾸미는 여자, 외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여자...
그리고 그 수많은 여자들 중에 나도 있었고, 너도 있었으며, 우리도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여자들 가운데 주인공 선이는 정말 나 같았고, 미주는
대학교 2학년 때 만났던 교양 과목 강사님 같았으며, 가은은
내 절친한 친구를, 그리고 한희는 우리 이모를 닮았다.
<코리안 티처>는 나의 이야기이자 친구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내 주변의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이건 완벽한 우리의
이야기다.
또한 <코리안 티처>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사랑에 목숨걸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도 팍팍한 현실에 사랑은 자주 포기되거나 포기하고 싶은 것이 된다. 간신히 첫 직장을 구한 주인공 선에게는 사랑에 신경 쓸 여유가 없고, 가은은 남자친구만 있지만 직장을 잃을까봐 사랑에 빠진 것을 후회한다. 한희는 자신과 살기 위해 영국을 떠나 무턱대고 온 남자친구가 낭만적이기 보다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현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다. <코리안 티처>는 H대 어학당에서 일하는 네 명의 강사들이 자신들의 일을 지켜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중 한 명만 지방대학교 출신이고, 남은 주인공들은 모두 수도권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석사 학위를 땄고, 일을 하면서 박사과정 까지 이수하고 있는 중인 여성들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을 가진 여성들인데도 그들의 일은 고달프고, 불안정할 따름이다.
네 명의 주인공, 선, 미주, 가은, 한희는 H대 어학당에서
일하는 계약직 강사다.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열심히 일한다. 선이는
베트남 학생들을 위해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고, 미주는 맡은 반의 성적을 항상 1등으로 만드는 실력 있는 강사다. 가은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생들을
위해 생일파티, 회식 같은 이벤트를 해주고, 한희는 H대 어학당에서 가장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강사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데도 네 사람의 일자리는 항상 위태롭다.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주인공
선이 어렵게 H대 어학당에서 강사 일을 얻으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H대
어학당이 폐쇄되면서 네 명이 모두 일자리를 잃으며 끝난다.
우리는 성실하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예전
세상에서는 성실함이 밥을 보장해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충분히 성실한데도 밥을
굶을 수 있다. 세상에는 우리의 밥을 위협하는 변수들이 너무 많아졌다.
네 명의 주인공들 중에서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성실했지만 결국 일을
잃는다. 성실하면 밥을 굶지 않는다는 신화를 믿었던
사람으로선, 성실했는데도 밥그릇을 잃었을 때 몹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주인공 선은 두 학기만에 강의평가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잘리고 나서 이렇게 고백한다.
왜 이렇게 됐는지 진짜로 잘 모르겠다고.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밖에 없는데요. 제가 더 뭘 할 수 있었던 거죠?” 선은 첫 직장인 H대 어학당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런데도 선은
일자리를 잃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잘렸다면, 다음 번에
잘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짓까지 해야 하는 걸까? 죽기 직전까지 나를 몰아붙여야 하는 걸까? 그러나 무리한 탓에 강의 도중에 쓰러진 적이 있을 정도로 죽자 살자 일했던 한희의 일자리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선은 어떻게 해야 일자리를 지킬 수 잇는 것인지, 그런 방법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무척 혼란스럽다.
혼란스럽기는 가은도 마찬가지다. 가은은 네 명의 강사들 중에서 이
일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은 사람이다. 선은 이 일이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서 하는
것 뿐이고, 미주와 한희는 언제든 그만두고 싶지만 당장에 생활을 꾸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
해나가는 것 뿐이다.
반면에 가은은 한국어 강사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다른 강사들에게는 강의평가가 업무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요소일 뿐이지만, 가은은 적절한 긴장감을
주는 제도로 생각할 따름이다. 그 덕분인지 가은은 유일하게 H대
어학당에서 강의평가 만점을 받은 적이 있는 강사다. 다른 강사들이 다 계약 연장에 실패해도, 강의평가 점수도 높고 책임 강사 자리까지 제의받는 가은은 일자리를 잃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나 가은의 일자리마저 너무 쉽게 사라지고 만다. 가은도
선이가 그랬듯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미주는, 한희는 뭐라고 고백했을까?
부끄럽지 않게 성실했음에도 결국엔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잃게 된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아마 두 사람도 선이와 가은이 했던 말을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그런거지? 정말 모르겠어. 뭐가 잘못된 거지? 도저히 알 수 없어….
한국어에는 유독 이유 문법이 많다고 한다. ‘-아/어서’, ‘-(으)니까’, ‘-더니’, ‘-(으)므로’, ‘-길래’, ‘-느라고’, ‘-(으)니’, ‘-(으)니만큼’, ‘-기 때문에’, ‘-는
바람에’, ‘-는 통에’, ‘-는 탓에’, ‘-아/어 가지고’, ‘-아/어’, 자그마치 이유 문법만 14개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이유 문법이 많은 한국어를 사용해온 우리들은
매사에 그렇게 된 이유를 찾게 되었을 지 모른다. 네 명의 주인공은 열심히 하는데도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싸한 이유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 최선의 답변이다. 이처럼 이유 문법이 넘쳐나는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뚜렷한 이유없이 일과 사랑이 위협받는 일이 넘쳐난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딱히 이유없이 먹고 살 길을 잃게
되는 세상을. 우리가 죽을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듯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일도 사랑도 잃은 선, 미주, 가은, 한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유 없는 일에서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은 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유를 찾으려 할수록
그들이 괴로워지는 모습을 봤다. 선은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가은은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한희는 조산을 하게 됐다.
이유
없이 일어난 일에서 이유를 밝히는 일을 그만두는 것. 어떤 일은 이유없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유를 밝힐 문법은 많지만 이유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최소한으로 상처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선, 미주, 가은, 한희. 이 네 사람이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빈번히 생기는 이 곳에서 조금만 상처받으며 살아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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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