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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phia
- 작성일
- 2020.10.26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
- 글쓴이
- 강수희, 패트릭 라이든 저
열매하나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자연농사는 자연과의 교감입니다.
논 한쪽 편에 볍씨를 뿌려서 이른 봄부터 쭉 길렀다는 어린 모들은 한 뼘도 안 될 만큼 작았지만 푸릇푸릇 싱싱했다.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삽으로 퍼서 모판에 담은 다음, 그 모판을 옮겨 논 바깥쪽부터 차차 실어나간다고 했다. 땅을 갈지 않는 데다, 이전 해 자랐던 작물의 밑동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논에 모를 심는 방식은 독특했다. 팔뚝보다 좀 짧은 길이에 엄지보다 조금 굵은 나무 막대로 모 심을 곳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깊이로 구멍을 낸 다음, 살며시 모를 넣고 주변 흙으로 덮어주면 끝, 저마다 속도가 다르다 보니 처음엔 한 줄을 다 심고 못줄을 넘기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따로 또 같이 각자 간격을 맞추어가며 부지런히 논에 모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자연농 방식으로 자급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물론이지요.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 부부는 논 430평에 밭 500평 정도, 합쳐서 1,000평 규모의 농사를 짓고요, 함께 사는 부모님은 밭 500평을 하십니다. 우리 3대 다섯 식구는 쌀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작물을 자급하고 있습니다. 콩, 팥, 옥수수, 고구마, 감자, 녹두, 고추, 들깨, 땅콩, 마늘 그리고 배추, 무를 포함한 여러 가지 채소를 키우죠. 우리 식구만을 위해서라면 면적이 더 작아도 되지만, 어머니는 친척과 지인 들에게 많은 양을 나눠주십니다.
매일 비가 오더라도 풀을 베어서 '밥'을 주기도 하고, 줄을 따라 벼 사이에 풀을 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 풀이 거름이 되고 김매기 역할도 해서 일석이조였어요. 워낙 오랫동안 화학비료에 의존해서 벼를 키워온 논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그런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저는 13년 동안 축산사료업체에서 일했습니다. 그동안 양계 기술, 경리, 품질 관리, 고객 상담 같은 여러 업무를 맡았는데요. 특히 달걀을 생산하는 과정을 보면서 더 이상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걸 두고 멀리 외국에서 수입해온 사료를 먹인다든지, 처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닭의 배설물을 태운다든지, 이렇게 제가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일을 받아 들이고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지역과 조화를 이루는 농사를 위해서는 우선 농사 규모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적당한 규모 안에서 한 농부는 이 품종을, 또 다른 농부는 다른 품종을 키우는 식으로 힘을 합쳐서 다양성을 지켜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사기술 이전에 농사를 짓는 철학, 마음가짐이 바르게 잡혀 있어야겠죠.
약 1,000평 정도에 논을 포함한 자연농사 재배 농장을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자연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적응한 것만이 살아남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과 철학을 바탕으로 저는 여기 제 밭에서 씨앗을 받고, 뿌리고, 기르고, 다시 씨앗을 받는 작업을 되풀이합니다. 그렇게 수확한 채소를 맛있게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갑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되풀이하다 보면, 그 안에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새롭게 태어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법과 철학, 이 두 가지를 모두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규모 또한 작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농은 땅을 갈지 않고, 풀이나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으며, 농약이나 제초제를 쓰지 않습니다. 환경에 부하가 걸리지 않는 방식이지요. 다양한 농사 방식이 있지만, 자연 안에 자신이 있다는 걸 깨닫고 우주르르 이해해 나가는 건 어렵습니다. 자연농은 그런 물음을 늘 마음에 두면서 답을 구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친한 아메리카 원주민 친구가 "이제는 돌아가서 네가 할 일을 해라." 하고 말하더군요.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고, 그렇다면 앞으로 자연농을 하면서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존의 가치관과 달리 가능하면 자본주의 편승하지 않고 돈이 움직이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키우는 채소를 전달하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돈을 도구로 거래하기 때문에 싸다거나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어요. 농사법을 공부하기보다는 자연을 공부해야 합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고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해요. 그런 태도는 자연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지요. 내 선입견을 버리고 자연을 받아들여야 진정 자연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모습을 따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있고, 거기에 내가 들어가야 해요.
다시 말하자면, 자연과 충분히 교감하기 위해 최소 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연이 우리에게 먹을 걸 베풀어 주지요. 우리에겐 길게 느껴질지 몰라도 자연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죠. 흙 상태 같은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이 땅과 얼마나 교감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게 자연농이 가능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구를 시켜 대신 경작한다거나, 일단 방치해두었다가 나중에 시작한다거나 하는 방식은 안 됩니다. 직접 자연과 충분히 교감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짓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방법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풀을 많이 벨 수도 있고, 적게 벨 수도 있고, 작물을 해롭게 할 수도 있고, 이롭게 할 수도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연과 어떻게 교감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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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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