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무심코 내뱉는 말,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될거야'. 많은 작가들 또한 자신의 이야기(체험했거나, 들었거나)가 작품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물론 박민규 정도를 제외하면(그는 자신이 경험한 내용은 소설로 쓰지 않는다고 했다) 말이다. 또 어떤 이(조정래 선생인 것 같다)는 자신의 경험에 한정된 글쓰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런 중에 재미있는 기획의 소설집이 나왔다.

아예 대놓고 '자전소설'이라 명명한 소설집. 박민규의 '축구도 잘해요'가 표제작으로 1권이 나왔고, 하성란의 '오,아버지'가 있는 2권까지 냉큼 구입했다. 역시 11월에 출간 예정인 3, 4권까지... 소위 잘나간다는 작가들의 글이 총망라되어 있다. 왠만큼 해도 자전소설이라 눈치를 챌텐데, 자전소설이라 명명한 가운데 작가들이 쏟아내는 작품은 과연 어떻게 다를지. '이건 대박이야'를 연신 되뇌이며 황급히 책장을 넘겼다.

1권에는 총 10명의 작가들이 등장한다. 아쉽게도 박현욱의 '벽'과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예전 그들의 소설집에서 이미 읽었기에, '그래 이 책 또한 자전소설이란 컨셉트로 작가들에게 새롭게 받은 작품들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김경욱의 '미림아트시네마'를 비롯하여 정한아의 '푸른 조가비'에 이르기 까지 평소 작가들에 대해 갖고 있던 내 느낌들이 어쩌면 이리도 정확한지. 성석제의 '홀림'은 예의 이야기꾼다운 그의 유년시절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유통기한을 읽어낸 김숨의 '럭키슈퍼'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러고보니 김숨의 작품은 내겐 첫만남이다.

우리 가게에는 사실 '있는' 물건보다 '없는' 물건이 더 많다. 그리고 백 원짜리 과자를 사더라도 절대로 십 원을 거슬러주지 않는다...그러고 보니 아빠의 유통기한이 오늘로서 삼 년하고도, 딱 백오십구 일이 지났다. P72~74

달동네 구멍가게를 생의 터전으로 삼은 가족들의 이야기다. 아마도 김숨 작가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간직된, 핍진하면서도 가슴 아픈 가족 이야기. 글의 흡입력이 상당하다. 주목해야 할 작가로 손꼽으며... 무미건조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한 윤성희의 '안녕! 물고기자리'를 넘겨 읽었다. 여전히 내겐 판단 보류인 김중혁의 '나와 B', 정말 글을 이쁘게 잘쓴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 김애란의 '네모난 자리들'. 사뭇 다른 글맛과 구성이면서도 '자전소설'이란 제목 아래 묘하게 어울림이 느껴진다.

10편의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박민규의 '축구도 잘해요'다.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읽어본 열혈독자로서 정말 '박민규다운 박민규 자전소설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마릴린 먼로였다는 그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온갖 상상력의 부산물로 채워놓았다. '그래 박민규라면 이 정도의 이야기는 나와줘야지. 암'하고 책장을 넘겼다. 우주인과의 교배 후 3명의 자식을 낳게 되고, 이어 김현과 아서 밀러가 등장한다. 결국 문학을 하겠다고 손을 든 전생의 마릴린 먼로가 작가 박민규였던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정말 박민규는 소위 문단이란 곳과는 담을 쌓았구나 싶었다. 그의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상의 매개들과 일상의 교묘한 혼돈. 마치 우주인과 자신이 교배를 해서 자식을 낳듯. 엉뚱함으로 똘똘 뭉친 그다.

신수정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소설가로만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진 어떤 순금의 시간이 발굴되는 현장에 동참하게 된다. 그것은 전율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동반한다. 소명에 대한 소름끼치는 가성. 장담컨대, 소설은 이 전율의 발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구를 덧붙여도 좋겠다.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소설이지요'

10편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이 일었다. 작가라서 자신의 경험을 이리도 능수능란하게 부려놓는 건지, 아님 그러한 경험들이 현재의 작가들을 만들었는지 말이다. 적어도 10편의 소설을 읽으며 난 여러 번 나의 추억과 빙의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성석제가 홀리듯 바라본 소년의 모습이 그랬고, 김경욱이 전전했던 동시 상영관의 어두침침한 풍경이 그랬다. 술에 취해 친구네 옥탑방을 오르내리던 곳의 사다리가 그랬다. 분명 비슷한 경험들을 간직했음에도, 그들을 작가로 키운 건 무엇이었을까? 소설가로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내가 알지 못하는 생의 비의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오랜만에 종합선물 세트같은 소설집 한 권을 만났다. 4권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42인의 자전소설. 11월이 가기 전에 죄다 읽어보고 싶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작가들의 체험 혹은 추억하는 방식이 꼭 그들의 글쓰기 스타일과 닮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거 다 자전소설인가요?'란 물음에 '그냥 소설입니다'라고 답할 작가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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