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는 겨울이 우기다. 금요일부터 기온도 뚝 떨어지더니 계속 비가 내린다. 천둥 번개까지 동반해 음산한 늦가을 주말에 이 책을 읽었다. 지적 유희를 즐기는 편이라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토요일 낮에 하던 '전설의 고향' 재방송도 못볼 만큼 겁이 많은 터라 선혈이 낭자하거나 살인이 등장하는 건 영화뿐 아니라 소설도 기피한다. 시각적인 것만큼 문자를 통해 상상하는 것도 여운이 길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이런 소설을 읽었으니, 이걸 최상의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밌다. 198쪽의 짧은 분량이고, 챕터들이 아주 짧게 나누어져 있어 매우 스피디하게 읽히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이 있다. 무서운 줄 알면서도 아빠 등 뒤에서 보던 전설의 고향처럼, 이제 눈떠도 돼, 눈떠도 돼, 물어보며 남편 손을 꼭 잡고 보는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처럼 계속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건 자체를 풀어가는 과정,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소설엔 두 개의 서로 다른 살인사건들이 큰 축을 이룬다.
'심야 버스 괴담'이라는 제목의 계기가 된, 심야의 버스에서 일어난 우발적 살인사건과 그 살인사건을 목도한 승객들에게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연쇄 살인범은 승객들 중 한 명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구일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 어떤 경우이든 살인자의 살인 동기는? 이미 일어난 살인 사건과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살인 사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을 통해 승객들이 한 명씩 소거되면서 용의자는 점점 줄어든다. 사실 이런 식의 패턴은 공포영화에서 많이 보아왔던 것이기는 하다(나는 이런 영화들은 너무 무서워서--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면 마구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정신건강을 위해 안 보기 때문에 영화제목까지 모두 나열할 수는 없지만,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같은 영화나... 그 영화의 영향인지 그 이후 매년 여름 개봉하는 한국 공포 영화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다). 익숙한 패턴이라는 건 뻔하다는 것도 되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패턴으로 검증되었다는 것도 된다. 더욱이 독자들이 이 작품에 쉽게 몰입하게 되는 건 사건의 배경이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라는 점, 그로 인해 이 작품에서 일어난 일이 어느 때건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일이라는 개연성 때문일 것이다. 강남역과 분당을 오가는 버스가 등장하고, 그 버스를 탔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된다. 대학생 남녀나 실직한 가장, 긴 생머리의 여자나 중년의 가정 주부 등의 등장인물 역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거리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스치며 지나쳤을 사람들, 혹은 바로 내 가족이나 나 자신일 수 있는. 오히려 이런 일상성이 공포를 극대화한다. 언제든 나도 이런 사건에 연루될 수 있다는 걸 아니깐.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이 해결되고, 살인자가 누군지 밝혀지는 순간 모든 것이 종결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의 후반부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화나 살인자의 독백을 배치한 것도 그것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도 작가의 이런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왜 살인자는 살인자가 되어가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나 그냥 추리소설로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滿月의 밤.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그들이 자부하던 이성의 나약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양심이나 종교적 신념이 허무하게 부서져내릴 때, 인간에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덧붙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심야 버스에서 실종된 운전기사를 쫓는 형사들의 역할이 너무 미비하다는 것. 사건이 '준호'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하고 추적하는 역할로 이들의 비중을 보완하고 마지막 살인자의 독백 부분을 줄인다면 구성상 훨씬 긴장감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대화를 통해 모든 걸 설명하고 해결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지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물론 살인자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고 그 사람을 이해하기엔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