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즘

아그네스
- 작성일
- 2019.9.26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 글쓴이
- 송해나 저
문예출판사
지금까지 여성의 삶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왔다는 걸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깨닫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생리와 임신, 출산이 대표적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의 삶이 말과 글이 되지 못하고 은폐돼 왔다는 건 무슨 뜻일까? 말할 가치가 없을 만큼 중요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거나, 아예 관심도 없고 따라서 무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이다. 아마도 낙태가 피임의 도구처럼 돼버린 현실에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무지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열 받아서 매일매일 써내려간 임신일기'라는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 임신한 여성이 자각하는 현실은 개인적으로는 적응되지 않는 변화하는 몸 상태에서부터 임신부를 바라보는 냉담한 시선과 배려 없음, 산부인과에서 임신부를 환자 취급하는 진료를 받으면서 느끼는 불쾌함 등이 먼저 떠오른다. 또한 임신부를 대할 때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아기를 뱃속에 데리고 있는 비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태도는 임신에서 임신부를 소외시키는 아이러니한 경험이다.
저자의 임신 일기는 계획 임신을 한 임신초기부터 임신중기와 말기를 지나 출산까지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그러한 상황을 적고 있다. 임신부 개인의 신체적 건강과 스트레스 환경에 따라 경험하는 차이는 있을 테지만 대부분 공감할 수 있다. 게다가 페미니스트인 저자의 의식 덕분에 임신부가 느끼는 외부적 불편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다 함께 생각해보고 대안을 마련하는 쪽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실질적인 출산률 상승은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을 만큼 성 평등하고 희망이 있는 나라 만들기와 함께 임신부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함께 생각해보고 변화하길 바라는 본문의 내용들 일부를 소개한다.
이 세세한 고통과 비참을 왜 내게 아무도 안 알려줬을까? 임신과 출산을 겪은 여성들에겐 말할 곳이 없었고, 나는 들을 곳이 없던 게 아닐까? 임신 과정의 실상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30p)
최근 임신기간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이용하고 있지만, 업무량은 줄지 않아 더 바쁘고 힘들어졌다. 동료들은 네 시 이후의 내 공백을 불편해하고, 벌써부터 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의 대체근무자가 될까 걱정한다. ... 무심한 동료들을 원망하게 만드는 건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제도의 올바른 정착 없이 '저출산' 극복? 그런 건 없다. (47p)
우리 사회가 임신한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장소는 지하철이다. 임신 이후 지하철에서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비참悲慘이다. ... 이미 누군가 앉아 있는 임산부배려석 앞에서 임산부 배지를 달고 한두 시간씩 서서 가는 내 모습에 가끔은 웃음도 난다. 블랙코미디 프로그램을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다. (50p)
임신부를 의학적 위험성을 안고 있는 환자로 분류하고, 미미한 소견에도 병리학적 진단을 내려 임산부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이 임신·출산 프로세스가 과연 올바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임신 자체로도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임산부를 위한 적절한 처치는 부족한 반면 이들을 쉽게 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지난한 검사만 요구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104p)
아기 낳을 준비를 하는 만큼 생애 처음 육아서적 코너에 갔다가 놀라운 걸 봐버렸다. 대부분의 육아서적에서 전제로 하는 양육자는 '엄마'뿐이고, '아빠'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 아기는 엄마 혼자 만들고, 엄마 혼자 낳고, 엄마 혼자 키우는 거였구나. (189p)
당신들이 고생하며 양육과 가사를 '돕고' 있는 게 '원래는 아내 몫'이라는 저급한 인식만 드러날 뿐이다. 아내가 임신하고 고생하는 건 자연스러우면서 남편이 양육과 가사를 맡은 건 어쩜 그리 특별하고 숭고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자신과 아내가 동등한 위치는 아니라는 거지. 가사 '돕는다'는 남편들이 제일 싫다. (237p)
북미나 유럽 등에선 임산부의 방광 애로 사항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있어 공중화장실에서 임산부가 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상식을 뛰어넘어야 가능하다. '보통 어떠어떠한 게 상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무엇무엇이 당연하다'라는 생각을 약자를 대할 때는 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사고하고 말하는 게 세련된 시민의식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다. 그럴 거면 '사회적 약자'도 없겠지. (2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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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