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정치

初步
- 작성일
- 2020.3.19
결 : 거칢에 대하여
- 글쓴이
- 홍세화 저
한겨레출판
홍세화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의 저작을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의 책 제목이 하도 귀에 익어 읽은 줄 알았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에 없는걸 보니 착각을 했나 보다. 하긴 남민전 사건이나 진보정당과 관련하여 한때 뉴스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그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은 책이다. <결>이라니, 결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나무, 돌, 살갗, 비단 따위의 조직이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단도직입적으로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라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결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처럼 사람에 대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 ‘그 사람의 결이 참 좋다’라고 할 때 왠지 모르게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결은 거칠기만 하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환경 모두가 거친 결을 가진 세상에서는 둥글기보다는 뾰족하고 거칠어야만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이 책에서 살펴보고 있다.
편하게 사는 것과 인간답게 사는 것을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드는 세상은 자유롭고 존엄하게 태어난 인간에게 온갖 억압기제로 굴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고 말하는 그는, 무엇보다도 ‘나를 잘 짓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를 잘 짓는다는 것은 자유인이 되어야 하고, 나를 잘 짓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회의하는 자아’이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억압과 거친 사회의 결 가운데에서도 한결같이 중심을 잡았던 그였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진실로 자유로운지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저자는 자유의 조건인 외로움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유는 외로움과 또 그것과 함께 밀려오는 심리적 불안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대가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집단 속에 숨게 되고, 집단속에서도 다수파에 속하고자 한다. 우리는 분명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라는 구조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력과 금력에 의해 노예로 길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억압된 삶을 살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거대담론과 프레임에 매몰되어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외로움과 불안대신 평안함을 누린다. 노예제 아래에서 노예는 자신이 노예인지를 알지만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이 노예인지 조차 모르고, 노예이지만 노예인지 모르니 평안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나를 잘 짓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남과 비교하는 일을 멈추라고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익숙하게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남보다 우월한 나를 추구한다면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남이 되고, 그런 삶에서는 나를 짓는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따라서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대신 이웃과 연대하려는 열정에 헌신하는 자유인이 되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회의하는 자아여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말만 할뿐 남들을 설득하지도 않고 또 스스로 바꾸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사회 역시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따라서 우리는 회의하는 자아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문한다. 저자가 말하는 ‘회의하는 자아’란 자기 의지로 자신의 사유세계를 열어 자기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 머릿속에는 지식과 정보가 가득 차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들이 자신을 주체적인 삶으로 안내하는지 아니면 복종의 삶으로 이끄는지, 나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지 아니면 잘못된 길로 이끄는지 등에 대해 묻거나 생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이끄는 대로 고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설득이 어렵고 선동하기 쉬운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회의하는 자아가 필요하고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고귀함이 아니라 고결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고귀함은 태생적으로 선택된 사람이거나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사람의 몫으로 그 반대편에 비천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고결함은 타인의 비천함을 전제하지 않는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면서 자기 성숙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고결한 존재의 조건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우리의 존재와 의식의 어긋남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사회는 흔히 20:80의 사회라고 불릴만치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에 달하고 있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서사들 대부분은 20과 관련된 것들이다. TV에서는 20에 속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유포하는 논리와 주장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이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 결과 80의 사유세계는 20의 것들로 채워지면서 80에 속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소외시키고 있다. 이처럼 우리들 대부분은 80에 속한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고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그래서 몸은 80에 속하면서도 같은 처지의 80에 공감하거나 감정이입하지 못하고 오히려 20에 공감하고 감정이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징폭력과 함께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계를 정당한 것 혹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기제라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회의하는 자아를 통해 나를 온전히 지을 수 있는 자유인이 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사회를 조금 더 정의롭고, 조금 더 자유롭게 바꿀 수 있음을 이 책에서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 모두를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편하게 사는 것과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사회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많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먼저 변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말하는 ‘회의하는 자아’가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와 함께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남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할 때, 시민들의 적극적인 연대활동과 올바른 정치참여만이 그 길을 열어줄 것이다.’라는 책의 마지막 문장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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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