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86)

세상의중심예란
- 작성일
- 2020.6.23
숙명
- 글쓴이
- 히가시노 게이고 저
소미미디어



『숙명』은 추리소설 분야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3년에 발매한 작품을 하드커버를 입혀 재출간 된 소설이다. 다작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출간하는 소설마다 치밀한 구성과 잘 짜여진 스토리로 극의 몰입감과 재미를 추구한다. 이번 소설 역시 인간의 뇌 영역이라는 첨예한 소재를 바탕으로 숙명적 인연의 끈에 얽힌 두 남자의 삶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킨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범인이 잡혀도 예상치 못한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방심할 수 없도록 의외성에 주목하게 만드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서장에 등장한 벽돌병원에서의 사나에의 죽음은 본문에 펼쳐질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와쿠라 유사쿠는 유년 시절 사나에와의 즐거운 추억과 그녀의 죽음이 깃든 벽돌병원을 찾곤 한다. 그 시절, 우연히 마주친 아키히코가 묘하게 거슬렸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며 둘은 숙적의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유사쿠가 아무리 이기려 해도 성적은 물론 운동과 그림, 싸움까지도 모두 아키히코에게는 대적이 안 되는 게임이었다. 늘 말이 없던 아키히코는 혼자이기를 자처했고 밝은 성격의 유사쿠는 친구들을 유쾌하게 이끄는 리더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아키히코를 이길 수 없었던 유사쿠는 열패감만 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뇌출혈을 일으키면서 학업과 꿈을 접어야 했다. 가난한 경찰관의 아들이었던 유사쿠는 아버지처럼 경찰이 되었고, 대기업 UR전산의 대표이사를 아버지로 둔 아키히코는 보장된 미래를 걷어차고 뇌의학 전공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유사쿠의 아픈 사랑이었던 여인은 아키히코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미사코는 10년 전부터 '실'의 존재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소스케가 공사 중에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왜 뇌 신경외과에서 1인실 장기 입원을 했으며, 퇴원 후 대기업 UR전산에 40대 남성이었던 아버지의 재취업이 가능했는지, 그녀 또한 응시한 모든 회사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유일하게 UR전산은 그녀를 채용했으며, 어쩌다가 UR전산의 대표 우류 나오아키의 아들 아키히코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였다. 계속된 행운에 그녀는 행복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 와중에 시아버지인 나오아키가 임종을 맞게 되고, 새로운 대표이사인 스가이 마사키요가 스가이 가의 묘에서 살해되었다.
"왜 그 사람을 의심해?"
"직감이야. 녀석에 관해서는 내 안테나가 특별히 움직여."p168
"내가 남편을 감싸다니, 그런 일은 없어. 난 그 사람의 무엇을 감싸야 하는지도 모르는걸. 난 아무것도 몰라. 이 집에 온지 몇 년째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내 인생은..... 보이지 않는 실이 조종하고 있어."p170
유사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어째서 이 녀석을 좋아할 수 없었는지, 어째서 이유없이 싫었는지.
닮았기 때문이다.p387
흉기는 우류 나오아키의 유품인 독이 든 석궁용 화살이고, 유품을 보관하던 방에서 석궁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사건의 모든 정황은 아키히코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다. 유사쿠는 거짓 진술을 하는 아키히코를 의심하고, 미사코 역시 베일에 감춰진 남편에 대한 의혹을 벗길 기회로 생각한다. 또한, 이 사건은 벽돌병원에서 만났던 사나에의 죽음까지도 이어져 있다. 이에 유사쿠는 자신의 청춘을 걸고, 사나에 사건까지 파헤쳐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돈만 있으면 사람의 몸도 연구 재료로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의 윤리의식에 대한 분노였다. 만약에 뇌 속에 정밀 부품을 심을 수 있고, 외부에서 전파를 보내서 감정 조작이 가능하다면, 어떤 상대든 스파이로 만들 수 있다는 패권주의가 낳은 인체 실험이었다.
창업 이후 줄곧 우류 파와 스가이 파로 대립해 왔던 UR전산은 상대를 흡수하기 위해 기를 썼다. 우류 가에는 아키히코가 의사를 선택하면서 후계자는 없지만 기싸움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파벌로 인한 살인이 맞을까? 치정에 얽힌 아들의 복수일까? 살해 직전, 마사키요가 집착한 우류 가의 오래된 파일에는 어떤 비밀이 담긴 것일까?
유사쿠와 아키히코는 왜 그토록 서로를 묘하게 신경 썼고, 언제나 서로를 의식하고 마음이 어수선했으며, 날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음을, 숙명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음을 종장에 와서야 명백해진다. 또한, 아키히코가 아버지 가업을 잇지 않고 왜 의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결말 부분에서야 드러난다. 읽다가 너무 궁금해서 뒷장을 보고야 말았는데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절대 이런 우를 범하지 마시길 부탁드린다. 숙명이라는 단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핵심적 반전 요소이기 때문이다.
#숙명 #히가시노게이고 #일본소설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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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