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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phia
- 작성일
- 2020.9.3
40세에 은퇴하다
- 글쓴이
- 김선우 저
21세기북스
지금의 금융 시스템에는 최소한의 발만 담그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으며, 밤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이를 닦을 수 있는 곳에서 사는 건 엄청난 특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새롭게 마주한 삶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 일단 소비를 줄였다. 물건은 되도록 사지 않았고 꼭 필요한 물건은 중고로 구입했다.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기에 좋은 옷을 입을 필요도, 멋을 낼 필요도 없어 옷은 대충 입고 머리는 집에서 바리캉으로 깎았다.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다. 스마트폰을 폴더 폰으로 바꿨고 집에서 사용하던 인터넷을 끊었다. 비누와 샴푸는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 썼다. 그러다가 아예 샴푸는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처럼 단순하게 살다 보니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땅을 사서 시골로 이사를 왔다. 사과나무와 블루베리 나무를 심고 채소를 길렀다. 끼니는 간단하게 해 먹는다.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요리도 최소한으로 하고 식재료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먹는다. 모든 집안일은 직접한다. 농사를 짓지만 땅을 파고 큰 나무를 자르는 등 값비싼 기계가 필요한 농사일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내 몸이 감당할 만큼의 일만 한다.
시골 부동산 시장은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좋은 땅은 금방 팔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쇠뿔을 단김에 빼는 건 스타트업 기업들이 흔히 사용하는 '린 스타트업'과 비슷한 전략이다. 린 스타트업이란 아이디어를 빠르게 전개해 최소 요건 제품을 만든 뒤에 시장 반응을 보고 그다음 제품에 반영하는 과정을 반복해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식이다. 미국의 벤처 기업가 에릭 리스가 개발했다. 린 스타트업의 기본 모토는 일단 시도하고, 배우고, 개선하는 것이다. 사실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 가능한 삶의 진리다. 특히 요즘 같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무조건 극도의 긴축 재정을 시행하는 건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돈이 부족한 대신 일을 하지 않아 시간이 많기 때문에 시간으로 때울 수 있는 건 일단 시간으로 해결했다. 시간이 많으면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천천히 조금씩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시간이 많으면 요리할 때 굳이 전자레인지가 필요 없다. 만들어 쓸 수 있는 건 만들어 쓰고 빌릴 수 있는 건 빌렸다. 소비와 소유를 줄이면서 물질로부터 얻고 싶은 욕망의 크기 자체가 작아졌다.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남아도는 시간으로 물질 대신 사람에 집중하고 관계와 경험에 방점을 뒀다. 그러면서 소비를 줄이는 건 꼭 비참해져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방 3개 대신 방 2개짜리에서 살면 상당히 많은 돈을 아낄 수 있다.
자연 농법으로 일군 농장을 만들어보겠다는 꿈이 생기면서 마음이 느긋해졌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이 그리워서 대안으로 시작한 번역 및 글쓰기도 적당하게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갔다. 농사일은 '우이공산'의 마음가짐으로 하기 시작했다. 올해 날씨가 안 좋아서 잘 안 되면 어차피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굳이 힘들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았다. 뭔가를 꼭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사라졌다. 스트레스가 줄어든 셈이다. 게으르지만 너무 게으르게만 지내지 않으려 한다.
사실 미국인들은 모든 것을 빚으로 산다. 집은 모기지로 사고 자동차는 리스를 하며 심지어 가구도 할부로 산다. 조금이라도 비싼 물건은 다 장기 할부 옵션이 있다. 그래서 많은 수의 미국 중산층들이 월급을 받은 뒤에 할부금과 이자를 내고 남은 돈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한다. 목돈 마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에 보내고 모기지를 다 갚고 나면 은퇴를 해서 역모기지로 현금을 받아 생활한다. 잘만 되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라도 어긋나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냉장고나 세탁기가 갑자기 고장 나면 새로 장만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은 축에 속한다. 혹시라도 회사에서 잘리면 월급으로 모기지와 할부금을 내는 선순환 구조가 한순간에 악순환으로 바뀐다. 모기지를 내지 못하면 몇 달 안에 집에서 쫓겨나고 자동차도 빼앗긴다.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례도 많다. 그런데 가만있자… 써 놓고 보니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점점 더 미국을 닮아가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라도 빚이 없거나 적으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일단 매달 나가는 돈의 액수가 엄청 줄어든다. 그러면 직장을 잃어도 당장 집에서 쫓겨나는 대신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 바닥에 나앉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요즘의 천정부지 부동산 시장에서 안정적인 주거를 하려면 빚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긴 하다. 반대로 빚치 없으면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홀가분한 세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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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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