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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11.30
파견자들
- 글쓴이
- 김초엽 저
퍼블리온
21세기를 평화의 시대라고 떠들기가 무섭게,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크고 작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인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문명의 역사는 보여준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적을 만드는 존재라는 사실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에, 권력을 얻기 위해, 인간들은 끊임없이 무찔러야 하는 적을 만든다. 그리고는 적에 대한 공격을 합리화한다. 적으로 규정된 존재에게는 무차별적인 물리적, 정신적 폭력이 가해진다.
적을 향한 공격이 엄중하게 이뤄지는 것에 반해, 인간이 적을 결정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달라서 낯선 것’은 적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다른 인종의 사람들, 다른 나라의 사람들,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 다른 성별의 사람들, 다른 행동 양식을 따르는 소수자들, 그래서 낯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공격의 대상이 되고 만다. 낯선 존재를 향한 적의와 분노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생존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낯설고 불확실한 존재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지도 모른다. 이런 위협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낯선 것이 눈앞에 있을 때 편도체에 불이 켜지도록 진화했다. 이 부위가 활성화되면 우리 몸에 스트레스 반응이 나타난다. 이성은 마비되고, 시야는 좁아지고, 각성 상태에 빠지면서, 우리 몸과 마음은 낯선 것과 싸울 준비를 마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긴장 상태로 있으면서 무언가와 싸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인류 전체가 평화롭게 사는 건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불가능한 일일까? 평화를 얻으려면 우리는 본성을 극복해야 한다. 낯선 것에 대한 경계를 풀어야 한다. 낯섦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이긴 한 걸까?
<파견자들>의 배경이 되는 미래 사회에서도, 우리의 후손들은 내면에 깊숙이 새겨진 본능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파견자들> 속 인류는 이름도, 형태도 낯선 범람체를 적이라 여기고 살아간다. 범람체는 어느 날 갑자기 지상에 나타난 외계 생물이다.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 범람체는 의식은 없고 번성하고 퍼져나가는 본성만 지닌 물질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군집을 이루면 하나의 고유한 의식을 가진 지적 생명체처럼 군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범람체는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상의 모든 것을 뒤덮기 시작한다. 어떤 물질이 범람체에 노출되면 범람화가 진행된다. <파견자들>의 인류는 범람화를 죽음으로 여겼다. 다른 생명체와 달리, 사람은 범람체에 노출되면 신체가 아닌 뇌에서부터 변이가 일어난다. 이 변이는 자아를 해체시키다가 끝내 그 사람과 멀쩡한 사람들까지도 죽게 한다.
“발현자들은 처음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속한 곳을 잊어버리며, 급기야 지금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자꾸만 달아나려 한다. 때로는 벽을 뚫고, 바닥을 지나서 가려고 온몸을 막힌 곳에다 부딪히고 또 부딪히다가 스스로 죽어버린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깨려는 것이 벽이나 땅이 아닌, 다름 이들의 머리통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서서히 미쳐버린다.”(p.187-188)
<파견자들>에서 인류는 낯선 범람체를 피해, 죽음을 피해 지하에 터를 잡는다. 지상 세계는 온전히 범람체들의 것이 되고 만다. 지하로 피신한 인류는 범람체와 그것이 점령한 지상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다시 범람체로부터 지상 세계를 탈환할 계획을 세운다.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하는 파견자는, 인간이 지상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만든 새로운 직업이다.
파견자들은 예외적으로 지상에 올라갈 수 있다. 범람체와의 접촉도 어느 선에서는 허용된다. 지상으로 투입된 파견자들은 지상 세계와 범람체를 조사하는 일을 수행한다. 범람체를 파괴할 방법을 연구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것도 파견자들이 하는 일이다.
<파견자들>의 주인공인 태린은 파견자가 되고 싶다. 태린은 파견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환청과 환각에 시달린다. 느낄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 내가 아닌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태린은 급기야 환청과 환각을 일으키는 머릿속 존재에 의해 몸의 통제를 빼앗기기도 한다. 태린은 그 존재에 ‘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통제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태린은 파견자 시험을 통과하기 직전에 ‘쏠’에게 몸의 통제를 빼앗기며, 자신과 관중들까지도 위험에 빠트린다.
그 일의 대가로 태린은 지상에서 기지 설립예정지를 조사하는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에 태린은 늪인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범람화된 사람들을. 사람은 범람화가 시작되면 뇌부터 변하지만 늪인들은 달랐다. 온 몸이 범람체로 뒤덮여도 뇌만은 멀쩡했다. 범람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도 자아를 갖고 살아가는 늪인들의 존재는, 태린이 갖고 있던 범람체에 대한 상식을 뒤흔든다.
늪인들을 만나기 전, 태린은 범람체를 보면 본능적으로 역겨움을 느꼈다. <파견자들>의 인류 대부분이 그렇듯이 말이다.
“성인 남성 정도의 체격을 가진 시체는 형형색색의 범람체로 뒤덮여 있었다. 보라색, 빨간색, 파란색의 범람 산호들이 빼곡하게 자라나 언뜻 보아서는 의도적으로 조형한 전시물 같았다. 안구가 있던 자리를 꿰뚫고 자라난 버섯 모양의 범람 산호. 한때는 뇌였던 것의 형태를 모방하여 머리를 덮은 범람체는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p.71)
그랬던 태린은 늪인들을 만난 순간, 그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본능적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태린의 상식대로라면 너무나 기이하고 이질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범람체는 역겨워야 했다. 아름다울 수 없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신을, 그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범람화된 인간의 모습은 충격적인 동시에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린은 그렇게 생각한 스스로가 경악스러웠다.”(p.188)
늪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태린은 점차 범람체에 대한 상식을 의심하게 된다. 범람체는 끔찍한 존재가 맞을까? 범람체가 지상을 점령한 게 끔찍한 파국이 맞나? 태린은 ‘쏠’의 목소리를 따라 스스로 범람체 속에 뛰어든다. 그곳에서 태린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식을 갖게 된 범람체와 대화할 기회를 얻는다. 범람체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간이 개체와 자아를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면 범람체의 방식은 이와 정반대였다. 범람체는 ‘나’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기에 너희는 단수체가 아니야. (...) 너희는 이미 수많은 개체의 총합. 하나의 개체로는 너희를 설명할 수 없어. 네 안에는 다른 생물들이 잔뜩 살고 있어.” (p.182-183)
그렇기에 범람체는 인간이 목숨처럼 여기는 자아가 허상이라고 여긴다. 사람이 범람화되어 자아를 잃더라도, 범람체는 그것을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게 된 것일 뿐이다. 범람체는 태린을 비롯한 인간들의 방식을 지적하지만, 자기 방법만 옳다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인간들의 이상한 방식을 존중하기로 한다. 그렇게 늪인들이 탄생했다.
“늪인들. 우리는 그들과 결합하며 그들의 자아를 완전히 침범하지 않는 법을 배웠어. 우리가 처음에 인간들을 늪의 일부로 흡수했을 때, 그들은 개별적 개체로서의 자의식을, 자아를 소중히 여긴다고 알려주었어. 네가 설명했던 것처럼, 어떤 인간들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자신의 자아 뭉치를 유지하겠다고 고집했지. 그래서 다음에 또 다른 인간들이 늪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천천히 그들의 몸으로 들어갔어. 뇌를 피해서 신체에 자리잡았어. 그러면 그들은 자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어.” (p.243)
범람체에게 자아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자아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의 방식을 바꿔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인간의 방식과 범람체의 방식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건 범람체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범람체는 끊임없이 가지를 치거나 흡수해서 뻗어나가는 본능을 갖고 있다. 본능대로 한다면 범람체는 인간의 뇌에도 자리를 잡아야했다.
본능을 극복한 범람체는 늪에만 있지 않았다. 태린은 늪에서 머릿속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는 ‘쏠’이 사실은 범람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린은 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범람체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 그 사고로 어린 태린의 머릿속에 범람체가 자리하게 된다. 태린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은 실험실로 옮겨져 관찰 대상이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범람체를 견뎌내지 못했다. 다들 광증에 걸려 이른 나이에 죽었다. 태린만이 달랐다. 태린은 머릿속에 범람체를 지니고도 문제없이 건강했다. 그 차이는 범람체를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태린은 범람체에게 이름을 지어준 최초의 아이였다. 태린은 머릿속 범람체에 ‘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소중하게 대했다.
“아무튼 쏠에게 하루 두 시간 정도는 확 열어주는 거예요. 빌려주는 거죠. 그러면 아주 이상하고, 근질근질한 느낌이 나요. (…) 기분이 썩 좋지는 않죠. 그렇지만 전 그게 효과가 좋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일단 그렇게 쏠에게 몸을 빌려주고 나면 쏠은 짜증을 덜 내요.” (p.287)
본부의 명령으로 태린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범람체를 분리시키는 약물이 투여된다. 태린의 범람체 ‘쏠’은 약을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태린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기를 택한다. 범람체의 본능을 거스르고서.
반면에 인간은 낯선 존재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본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파견자들> 속 사람들은 범람체를 공존할 대상이 아니라 무찔러야 할 적으로만 여겼다. 인간과 범람체와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주는 늪인들에게서 인류는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범람체와 마찬가지로 불결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늪인들과 범람체를 모두 물리치고 인간이 다시 지상을 독차지하는 것. <파견자들>의 파견자와 그들을 관리하는 본부는 극의 말미까지 오직 그 목표에만 전념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낯설고 다른 존재들과 계속해서 전쟁을 하듯이.
인간에게 본능을 극복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태린같은 소수의 사람만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듯하다. 그에 비해 범람체는 너무나 쉽게 본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늪의 범람체는 자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인간의 말을 듣고서 곧바로 뇌를 피해 자기화를 시작한다. ‘쏠’은 태린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느끼고 곧장 사라지는 쪽을 택한다. 범람체가 이처럼 쉽게 본능을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인간에게는 있지만 범람체는 없는 것.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람체는 나와 너를 구분 짓지 않는 생물이다. 범람체의 가지들은 증식하는 본능에 따라 독립적으로 뻗어나가지만, 모든 가지들은 상호 연결된다. 범람체가 흡수한 존재들은 하나로 연결된 범람체와, 범람체에 흡수된 다른 것들과 또다시 연결된다. 범람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만물과 연결 의식을 가진 범람체에게 인간은 없애야할 적이 아니었다. 인간은 범람체의 일부인 동시에 범람체 그 자체였다. 범람체는 인간을 위해 본능을 포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위한 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범람체는 기꺼이 본능을 거스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인간은 나와 너를 철저히 구분한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지 못하고, 다른 것 또한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종과의 연결성뿐만 아니라 같은 종간의 연결성도 부정한다. 다른 사람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고 여긴다. 나는 오직 나일 뿐이다.
우리가 범람체와 같은 의식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본능적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저 낯선 존재가 실은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여길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있지 않을까. 낯선 것과 싸우기를 멈추고 공존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까. 낯섦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범람체의 방식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우리가 진화의 산물임을 떠올리자.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단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진화의 산물이다. 너와 나, 그리고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태초에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에게 낯선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낯선 것과 싸울 이유도 없다. 우리는 마땅히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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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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