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

미리내별
- 작성일
- 2011.9.14
고리오 영감
- 글쓴이
- 오노레 드 발자크 저
열린책들
파리의 낡은 하숙집에 세 들어 사는 주인공격인 가난한 법대 학생 외젠 드 라스티냐크와 주위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직은 순수한 청년인 외젠의 눈을 통해 옆방에 사는 보잘 것 없는 한 인물의 삶과 몰락을 통해 그 시대 파리 상류층과 서민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귀족집안 출신이기는 하나 가난한 고학생 외젠은 하숙집 주변에서 풍겨오는 가난의 냄새, 비루한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친척누이 보세앙 부인을 통해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이려 결심한다.
다른 여자가 이미 선택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세상에는 많으니까요. 마치 우리가 쓴모자를 뺏어 쓰고는 우리 생활 방식이 자기 것이 되기를 바라는 소시민이 있듯이 말이에요. 당신은 성공할 거예요. 파리에서 성공이란 모든 것이죠. 즉 힘의 열쇠란 말이에요. 만약 여자들이 당신을 재기 발랄하고 재능 있는 남자로 생각한다면, 남자들도 그걸 믿을 거예요. 당신이 특별히 그들을 실망시킬 만한 언행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당신은 뭐든지 원해도 되고, 어디든 발을 들여놓을 수 있어요. 그러면 사교계의 실체를 알게 될 거예요. 속고 속이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속는 자도 속이는 자도 되지 말아요. 이 미궁 속에 들어가기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내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해줄게요. 하지만 내 이름을 욕되게는 하지 말아요. 96쪽
당장 입을 제대로 된 옷도 없는 외젠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골에 계신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고, 가난하나 순박한 이들은 힘들게 그 돈을 마련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돈과 함께 이러한 편지를 보낸다.
그러니까 어떤 길에 투신하고 있는 거냐? 너의 인생, 너의 행복은 현재의 네가 아닌 그럴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구나. 그러니까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을 쓰고 소중한 공부 시간을 낭비해야만 진출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드나드는 일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착한 아들 외젠, 엄마의 마음을 믿어 다오. 옳지 못한 길로는 대의에 이르지 못한단다. 너 같은 상황에 있는 젊은이에게는 인내와 체념이 미덕이 되어야 해. 지금 널 나무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보내는 이 돈에 어떤 씁쓸한 감정도 덧붙이고 싶지 않구나. 내가 하는 말은 자식을 믿고 또 앞날을 내다보는 어머니로서 하는 말이란다. 너의 의무가 무엇인지 네가 잘 알듯이, 네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며 너의 의도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나도 알고 있단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너에게 말할 수 있어. 자, 사랑하는 내 아들, 앞으로 걸어가거라. 난 엄마라서 떨고 있지만 우리는 기원하고 축복하면서 네 걸음걸음마다 애정을 담아 함께할 거야. 얘야, 부디 신중하게 처신해라. 어른들처럼 현명해야 한단다. 네게 소중한 다섯 사람의 운명이 너 하기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래, 우리의 모든 행운은 너에게 달려 있어. 네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듯이 말이다. 112쪽
마련된 돈으로 양복과 신발 등 화려한 겉꾸밈을 하고는 상류층 사교에 진출하게 되는 외젠, 여기서 알게 된 귀족부인인 레스토 부인과 재력가의 아내 델핀 드 뉘싱겐부인이 옆 방에 묵고 있는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인 것을 알고는 그들의 화려한 집과 비루한 그녀들의 아버지의 방을 비교하면서 너무 놀라게 된다. 두 딸의 행복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자세가 되어있는 헌신적인 아버지 고리오 영감을 보면서 연민을 느끼는 외젠, 고리오 영감은 외젠의 입을 통해 자신의 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한다. 딸들의 불행을 견딜 수 없는 고리오 영감은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죽어가는데, 딸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외젠과 친구 의사가 그의 임종을 지키게 된다.
외젠이 자기 주머니를 뒤져 보니 한 푼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크리스토프에게 1프랑을 꾸어야 했다. 돈을 꾼 것 자체는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라스티냐크의 마음에는 이로 인해 무서운 슬픔이 밀려왔다. 해는 지고 축축한 땅거미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무덤을 바라보다가 그곳에 청춘의 마지막 눈물을 묻어버렸다. 순수한 마음의 거룩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눈물, 떨어진 그 땅에서 다시 샘솟아 하늘까지 향하는 그런 눈물이었다. …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의 높은 언덕 쪽으로 몇 걸음 걸어 올라가, 등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센 강의 양쪽 기슭을 따라 구불구불 누워있는 파리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거의 탐욕스럽게 집착한 곳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앵발리드의 둥근 지붕 사이, 그가 뚫고 들어가고 싶어 했던 그 멋진 사교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웅웅거리는 벌집 같은 이곳에 그는 미리 꿀을 빨아내기라도 할 듯한 시선을 던지며 이 거창한 말을 던졌다.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첫 도전의 행동으로, 라스티냐크는 뉘싱겐부인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334쪽
작품 전반에 걸쳐, 서민을 대표하는 공간인 하숙집과 화려한 파리 사교계가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데, 고리오 영감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 몸담고 있는 곳은 달라도 모두가 속물이며 따뜻한 마음이 결여된 그들의 모습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다만 고리오 영감의 죽음을 지켰던 외젠과 그의 친구 의사의 모습이 조금 위안을 준다고나 할까. 자신들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모아 장례를 치뤄주는 모습은, 부자이고 권력을 다 가진 것 같은 고리오 영감의 딸과 사위들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외젠과 같은 마음이 따스한 이들이 이 모습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글쎄 그와 파리의 대결은 누구의 승부로 끝날 것인가. 치장하고 화려한 껍데기만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작가 발자크 주위의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평생 빚 독촉에 시달리며, 이를 갚기 위해 작품을 쉴 새 없이 써야 했던 발자크는 이때 이미 파리의 쓴맛 단맛을 모두 알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하다.
- 좋아요
- 6
- 댓글
- 18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