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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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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글쓴이
최진영 저
은행나무
평균
별점8.8 (130)
나나

 


최진영, 구의 증명 - 살았음을, 사랑했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의 증명>.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네 생각에 두 눈이 뻐근했다. 참지 못하고 너 보란 듯 세 편의 글을 썼다. 고작 절반도 읽지 못했을 때였다. 필사는 부러 오래 미뤄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벌었던 시간이 허무하게 첫 문장을 베껴쓰자마자 네가 왔다. 내 안으로 사무쳐 내 모든 것을 휘감는다. 아직도 이러면 어쩌냐고. 미어지는 가슴으로는 너를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대수롭지 않은 척 넘길 수도 없는데. 엉망으로 헝클어져서 소설을 더듬는다. 내가 그었던 밑줄을 뭉툭한 손톱 끝으로 곱씹는다. 그 시간들, 나는 온전히 ‘너’를 살았다, 예전처럼.



   우리와 비슷한 계절을 보냈을까, 그들은.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19p) 그런 말을 진정으로 주고받으며 각자의 애처로운 흉곽(19p)을 서로에게 비벼대는 것으로 버티는 날들을 살았을까, 그들도. 애들이 더럽다고 놀려도 그게 ‘구’의 손을 놓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던 ‘담’의 독백은 언젠가의 내 것과 같았다. 위험한 세상 대하듯 ‘담’을 대하는 ‘구’는 꼭 나를 대하던 너와 닮았지. 그런데 이런 식의 독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친 감정이입을 자각할 때마다 자문했다. 이렇게 읽어 내게 남는 건 뭐가 있나.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20p 


 


   담아. 우리를 기억해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103p 


 



   그래, 기억하자. 기억하는 거다. 지금 네가 없어도 내가 하는 거다. 날지 못해도 행복했던 그때를 내가 잊지 말자. 우리만이 우리가 했던 사랑을, 우리가 살았던 계절을 증명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기억해야지. 마음 놓고 떠올린다, 너를. 마음 놓고 불러본다, 네 이름.



 


   들어봐. 여기 여자가 죽은 연인을 먹어. ‘담’이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제 볼을, 눈을, 사지를 때리며 죽은 ‘구’의 손과 팔을 뜯어 먹어. 눈을 부릅뜨고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바로 보면서 잊지 않기 위하여 연인을 먹는다. 불행은 태어날 때부터 그들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졌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세계라고는 오로지 빚뿐이었어. 어린 구와 담이 자라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거대하게 빚덩이는 커져만 갔다. 불행의 문신은 어느 덧 몸 전체를 감싸고 있던 거지. 이 비극 앞에서 우리는 망연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해. 죽음이 차단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부르는 그들의 절박한 그리움을 너와 나는 들어줘야지.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 64p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방울이 뚝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을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84p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167p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나는 미친년이다. 사이코패스다. 인간이 아니다. 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구를 먹는다. 나를 비난하고 가두고 죽여도 좋다. 그 모든 것은 내가 구를 다 먹은 후에. 이 장례를 끝낸 후에. 104p 


 


 


   우리의 계절은 짧았고 우리의 지옥은 추상적이었어. 어쩌면 있지도 않은 지옥을 운운하며 겁부터 먹은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73p)이 뭔지 아는 우리는 알잖아. 서로를 빈틈없이 껴안기 위해 몸부림쳐봤던 우리는 ‘그런 사랑’이 뭔지, 잘 알잖아. ‘그런 사람들’ 을 삼켜버린 구체적인 지옥에 슬퍼하자. 분개하자. 죽음으로 반토막 나버린 연인이 아파서 보고 있기 힘들 거다.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하지 말아야지. ‘구’가 살아있었음을, ‘구’가 사랑했음을 증명하는 이 잔혹하고 처절한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야지.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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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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