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뜰,

소나
- 작성일
- 2021.2.28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나비꽃 에디션)
- 글쓴이
- 박우란 저
유노라이프
엄마(부모)와 딸(자식)의 관계, ‘사랑’ 뿐일까?
요즘 나의 엄마는 노년기 우울증상을 보이는 듯하다. 엄마는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지난 삶에 대한 과도한 후회와 자책, 자식들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는 무능감 등이 엄마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엄마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난 때문에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 자신마저도 무엇인지 모를 죄책감에 빠지는 등 나쁜 감정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엄마는 청춘을 다 바쳐 오로지 자식들을 키워냈으면서도 지난시절 자식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 하고 있는데, 엄마가 생각하는 ‘엄마노릇’에 대해 자식들이 이미 다 성인이 된 지금 후회하고 자책한다 해서 엄마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에도 왜 끝없는 자기멸시를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여성들, 특히 엄마들은 아이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에게 집중하기보다 내 탓이면 어쩌나 하는 죄책감을 먼저 갖게 되고, 이 죄책감은 또 다른 악순환을 불러옵니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한 자책처럼 보일 수 있지만,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이 자체보다는 나를 먼저 걱정한다는 말이지요. ‘내 탓일까 봐’의 불안, ‘나쁜 엄마일까 봐’의 불안(27쪽)」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감정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로서 타인에게 보여 지는 삶, 그러니까 아픈 아이를 충실히 집중하기보다는 보여 지는 ‘엄마역할’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엄마는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딸에게 온갖 하소연을 다하는 엄마가 있다. 그 엄마는 그런 딸과의 관계를 ‘친구 같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나는 어린 딸이 오히려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면서 엄마노릇 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 적이 있다. 그 엄마의 딸은 「부모의 욕망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좇아온 우리는 자신이 향하고 있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권위자가 욕망하는 대상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내적 갈등과 죄책감, 혼란, 소외를 겪으며 심리적 고통을 경험(81쪽)」하게 된다는 것처럼 딸로서 충분히 받아야 할 사랑과 수용을 받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엄마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은 자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엄마로서의 역할과 딸로서의 역할은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 자신의 결핍과 결핍감이 심할수록 아이를 통해 그 결핍을 해소하고자(34쪽) 한다면 엄마와 딸은 겉보기에는 서로 이해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내면으로는 고통받기에 충분하다.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말은 예전에도 틀린 말이었지만 요즘에 들어보면 ‘어떤 어머니들은 위대하다’라는 말로 고쳐 쓰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자식에 대한 학대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모든 어머니는 위대할까, 모든 어머니의 모성은 아름다울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사랑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실제로는 아이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거나 동일시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요. 엄마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회가, 세상이 만든 환상이고, 모성신화이기도 합니다. (155쪽)」처럼 자녀학대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정형화된 모성에서 벗어나는 엄마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어쩌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모성으로 인해 그것에 부합되지 않으면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엄마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해서요”, “내가 상처가 많아서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상처가 많아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나 핑계를 대는 것(250쪽)」은 자신의 결핍을 핑계로 마땅히 행해져야 할 부모로서의 일을 행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은 어쩌면 미성숙한 어른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책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읽으며 나는 엄마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엄마노릇’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이런 후회와 죄책감, 자책으로 스스로 엄마 자신을 보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이런 자신에 대한 비난은 과거 자식을 키우면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어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잘못들에 대해 자책이나 자기원망 등의 벌을 통해 보상하는 것, 즉 벌을 받고 있으니 잘못은 어느 정도 상쇄되는 식의 심리적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가 '너희들을 잘 키우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라는 말을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엄마의 자식들이 엄마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다는 뜻으로도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엄마는 자식들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엄마의 능력이 자식들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무능감, 그러니까 스스로의 무능력 때문에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모성이 반드시 자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숭고하다는 모성까지도 일정부분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모성에 대한 모독일까. 이렇게 인간은 이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 물론 엄마에 대한 나의 이해가 온전히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우리의 기억은 선택에 따라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부모와 자식의 기억이 판이한 것은 우리가 결국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혹은 그것이 고통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적 이득이 있는 쪽으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결핍을 선택함으로써 끝없이 갈망하고 욕망할 수 있는 것이지요. 끝없이 나약한 사람으로, 결여된 자로 요구를 멈추지 않을 수도 있는 것(126쪽)」처럼 나를 피해자나 결여자의 위치에 두고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것은 나 또한 나의 심리적 편안함을 위해 내게 이로운 방법으로 엄마의 우울에 대해 재해석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틀린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면 피차가 괴로운 일이다. 부모든 자식이든 상대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자신을 희생시키거나 자신을 위해 상대를 착취하는 일은 결국 삶에 대해 끊임없이 결핍을 재생산해내고 삶을 역기능적으로 작동하게 한다. 이렇게 자신과 자신의 삶이 불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내 시선이 누구의 평가와 가치, 판단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탐색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나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89쪽)」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내 지난 시간들을 나는 왜 그렇게 하찮게 취급하고 있었던 것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과도하게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 ‘있었던’그 시간을 나는 왜 충분히 내 안에서 재해석하고 소중하게 상징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270, 271쪽)」하는 것처럼 ‘있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좋은 날들’에 대해 충분히 확신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과거가 송두리째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지속적으로 원망하고 자책하기 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무엇이 결핍이 되어 있는지 오로지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결핍을 충족시키거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기능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해서 관계가 무한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오로지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이전에 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욕구가 있기에 이것들이 충분히 충족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면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로는 엄마(부모)로서의 혹은 딸(자식)로서의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것도 자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쾌락과 만족을 실현시킬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다”(279쪽)」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것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떠한 상황에서도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자로 여겨지는 부분.
248쪽 위에서 부터 세번째 줄 : 엄마 입장에서는 지치기도 ‘있고’ -> 지치기도 ‘하고’
- 좋아요
- 6
- 댓글
- 5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