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좀 씹고 다리 좀 떨어보지 않은 애들과는 친구하지 않는다는 여울이를 보며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실풍경이 떠오른다. 학기초가 지나고 서서히 얼굴이 익혀지면서 그룹이 나뉘게 된다. 공부에 열중하는 학구파, 까불거리거나 조용한 아이들,여울이처럼 껌 좀 씹어대고 다리도 좀 떨어주시는 일명 날나리들. 그 중에서도 대놓고 욕을 입에 달고 살거나 껌을 쫙쫙 씹어대는 아이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세계랄지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사립 중학교에서는 유난히 극과 극의 아이들이 많았다. 끼리끼리 논다고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비교적 두루두루 잘 지냈던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중간층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정쩡한 그룹. 여울이네처럼 복잡한 가족사는 아니었으나 그다지 평온한 형편은 아니었던지라 늘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꿨지만 그것도 성격탓인지 대놓고 삐뚫어지진 못하는 나는 그런 그룹과는 부러 어울릴 생각은 하지 못했고 관심사도 달라서 내 성격에 흔히 말하는 좀 노는 아이들과는 평생 어울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스무살 무렵에 알게 된 끝내주게 맛있는 라면집이 있었다. 젊은 아저씨가 혼자 하는 라면집이었는데 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한번씩 발걸음을 하던 곳이었다. 그 라면집에 가면 온통 어린 학생들 천지였는데 아이들은 대놓고 담배를 피워물고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섞여있고 서로 욕을 섞은 일상대화로 대화를 나누었고 가끔 남자아이 무릅에 앉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전형적인 불량서클의 아지트쯤 되는 모양새였다. 처음 갔던 날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 몰랐다. 그런데도 불량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스스럼없는 사장 아저씨와 아이들사이의 태도에 있었다. 아이들은 아저씨를 도와 라면도 나르고 잔소리도 맞받아가며 웃는 신기한 곳이었다.

성인이 되어 사장님과 알바의 관계로 만나게 된 언니가 알고 봤더니 내 또래였고 좀 논다하는 아이들이 대거 다닌다는 여상을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사장에게 잔소리해대는 알바와 그런 알바에게 대놓고 가게를 맡기곤 했던 사장님은 언니 동생사이로 발전하게 되면서 소위 과거에 좀 놀아본 언니의 영역안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체 게바라를 내게 강요하다시피한 혁명가 기질로 넘쳐나는 언니였기에 좀 놀아본 언니라고는 짐작하지도 못했던 나는 파란만장한 언니의 학창시절을 들으며 늘 배를 쥐어잡고는 했다. 특히 한 겨울에 늘 붙어다니다시피 하던 친구들과 술푸고 떡이 되어 언니네 집에 갔다가 아파트도 아닌 일반 주택의 난방 안되는 현관에서 그대로 고꾸라진 친구를 버려두고 두 친구는 방에 들어가버렸는데 아무리 그래도 얼어죽을까봐 걱정은 된 맘에 이불 하나 갖다 덮어 주었다는 일화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밤새 추위에 떨며 신발을 베고 자면서 왜 이렇게 춥냐고 언니 표현에 의하면 씨부렁거리며 자고 있더라는 언니 친구를 직접 만나서는 더했다.

언니와 언니 친구들은 참 고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다. 여울이처럼 복잡한 가족사를 가진 친구도 있었다. 사람은 힘든 역경을 지닌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다고 역경을 아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진심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의 부재에 대한 위로는 특히 그렇다. 처음으로 인생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그 언니였고 늘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애쓰는 언니와 언니친구들을 보면서 힘을 얻곤 했다.

사실 10대에는 나와 달라 보이는 아이들의 행동을 폭 넓게 이해하고 바라봐지지 않는다. 스무살 언저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시간이 주는 선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어느 날 다가왔다. 어느 덧 내 인생의 나이테가 두꺼워져 가던 때 알게 된 어린친구가 대학에서 전공과 관련해 청소년센터에서 상담교육에 참가하게 되었다며 이야기를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청소년센터가 지역마다 여러곳으로 많지만 당시 몇 군데 없었던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나 공부하는 내용이 여러가지로 흥미로웠던 기억도 난다.

흔히들 결손가정이라 말하는 복잡한 가족내력을 자랑하는 여울이가 자서전을 쓰라는 선생님의 말에 절대로 자신이 자서전같은 것을 쓰면 안된다며 복잡한 가족사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가장 많이 오버랩 되었던 것이 여울이에게서는 언니가 작가에게서는 어린 지인의 모습이었다.

여울이의 말과 행동은 레알 생생하다 못해 현실감 100퍼센트로 다가온다. 여울이나 여울이 가족들이 막 나가는구나 싶어도 이놈의 콩가루 집구석이라는 생각보다는 그럼에도 삶의 공존이라는 테두리가 가족의 단위에서 시작하고 영위된다는 것이었다. 여울이네 가족이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여울이는 분명 그 안에서 보호받고 있고 여울이 또한 그 안에서 함부로 벗어날 궁리를 하지 않는다. 가출과 출가의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나의 10대 시절이 떠올라 속으로 피식 웃음도 났다.

글은 여울이의 시점에서 자신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결혼부터 짐만 되는 가족들때문에 인생이 꼬엿다. 내 꼬인 인생의 주범은 너다 퍼부어 대는 할머니에 무능력한채 폭력적이기만 한 아버지, 살가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배다른 언니, 역시나 별 도움이 안될뿐더러 집안의 근심의 큰 축이라 할 수 있는 아픈 삼촌과 오빠에 대한 가족소개에서부터 얼굴도 모르는 댄서였다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같은 무거운 이야기를 시종일관 경쾌하리만치 가볍게 이어간다.

욕으로 단련되고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가족들 사이에서 여울이는 가벼운 날라리보다는 비행청소년도 될 법한데 외려 건전한 편이다. 엄마는 댄서였다는데 아빠를 닮았는지 몸치라서 춤도 못춘다.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일에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언니도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을 가려고 애쓴다. 그렇게 다들 따로 놀지만 날아드는 악다구니와 손맛 사이에 서로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마음이 있다. 불량이긴 하지만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데 한 울타리안에 모여있던 그 가족들이 하나 둘씩 떠난다. 곪은 상처가 터져 버린 것만 같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알을 깨고 나간 모습처럼 보인다. 곪은 상처가 흘러내린 공간은 단촐해지지만 온전히 더 추스려진 모습에는 긍정적인 희망이 남는다.

아이의 문제는 아이 혼자만이 아니라 어른이 제공하는 문제로 인한 경우가 가장 크다. 단순히 대인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장 밀접한 가족들이 주는 문제로부터 시작된다면 더더욱 힘이 들게 마련이다. 여울이네처럼 가난하지 않아서 복잡한 가족구성이 아니라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살아가며서 특히나 감수성 예민한 십대때 차라리 부모가 없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니 꽤나 행복한 축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여울이나 여울이 언니나 몸이 불편한 삼촌이나 오빠, 욕쟁이 할머니, 아니 어쩌면 분명 아버지까지도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냥 형편이 그렇다는 걸 안다. 형편에 구김이 가더라도 구김 사이사이 가족이란 얼개로 얽혀있는 끈은 모질기도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다. 아무리 웬수같아도 걱정되고 모종의 책임감이 싹튼다.

사람들은 누구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문제라고 결코 다 같은 문제일 수는 없고 지나고 나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뭉뚱그려 매몰해 버려서도 안될 일이다. 그러나 문제를 함부로 떠벌리거나 비관에 잠길 필요는 없다. 더 비참해질 뿐이니까. 스스로에게 해롭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에 나만 이런건 아니란 위로는 필요하다. 불량가족 레시피는 비록 소설이지만-아니 그렇기에 더더욱-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무겁지않게 표출한다. 그 무겁지 않은 경쾌함이 좋다. 여울이 가족들에겐 적어도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을 희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언니가 보고 싶다. 언니한테 전화해서 밥이나 먹자고 해야겠다. 언니는 밥보다 술이 좋다고 할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