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세이/심리/여행

初步
- 작성일
- 2020.5.12
아무도 하지 못한 말
- 글쓴이
- 최영미 저
해냄
산문하면 우선은 자유로움이 떠오른다. 읽다가 그만두어도 괜찮고, 읽고 싶을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들고 읽어도 그만이다. 때로는 진한 감성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저자의 일상을 엿보기도 하면서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삶을 읽는 재미도 있다. 거기에 더하여 혹 내 마음 속에 울림이라도 준다면 더할 나위없는 감동을 받기도 한다. 물론 모든 산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산문이라는 장르에 대한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가 정한 기준대로 분류되지는 않는 법, 그래서 때때로 장르에 대한 생각없이 책을 읽기도 한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이라는 산문집의 제목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아 긴장하며 책을 펴들었지만 작가의 말을 읽다 만난 ‘시로는 못 담을 말, 소설로도 다 못한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산문이다. 흩어진 문장. 마구마구 흩어진 문장들.’이라는 구절에 새삼 산문이란 장르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최영미 시인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시집은 두 세권 읽은 것 같다. 그녀의 시를 좋아하기도 하고 또 외롭고 힘들게 기존의 관념들과 싸우는 그녀를 응원하기에 그녀의 흩어진 문장들은 어떠할까 하는 호기심도 들었다. 신문, 잡지 등 기존 매체에 발표했던 글과 페이스 북에 올렸던 글들을 모아 엮었다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기도 했고, 그녀의 시집을 꺼내 들춰보며 시들을 다시금 읽어보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SNS를 하지 않기에 그런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는데 생소하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시인은 이 책에서 2015년부터 작년까지 자신의 일상을 시간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와 방황, 자신이 발표한 시와 소설에 얽힌 이야기, 촛불시위에 대한 단상, 그리고 시 <괴물> 발표이후 미투의 중심에 서게 된 시인의 고민과 투쟁과정은 물론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잔잔하게 그녀의 일상을 읽으면서, 또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며 읽어가던 글들이 문단 성추행 사건과 관련된 글에 이르면 산문을 읽는 편안함은 사라지고 만다. 대신 시인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묻어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단호함이 엿보여 읽는 나 자신이 마치 시인인 것처럼 빠져든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분노를 다시금 느끼고 어느새 그녀를 응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는 곳이 없어 1인 출판사를 차렸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는 현재진행형인 1인 출판의 세계에 들어선 과정들도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의 이름인 이미(imi)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었는데 자신의 시 ‘이미(already)’에서 따왔다고 한다. 처음 읽어본 시이지만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그녀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노력이 시이고, 그래서 시는 감정이 아니라 생활이며 경험이다’라는 릴케의 말을 소개한다.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시를 읽어보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다. 역시 나는 시보다는 산문을 읽을 때가 더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봄은 온다. 폐허에도 꽃은 핀다’라며 다시 시를 쓴다는 시인, 그녀의 글은 우리 또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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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